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두산 (문단 편집) == 명칭 == >此山乃白頭山之大脉, 各䑓真身常住之地. >'''이 산[* [[오대산]]을 말한다.]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해당 기록은 8세기경 신라 시대의 승려였다는 보천(寶天)이 입적하기 전에 쓴 기록을 일연이 다시 삼국유사에 옮겨적은 것으로 되어 있다.]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 지금의 개성시 송악산.]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 >고려사 권제1 세가1 고려세계[* 해당 기록은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한 것으로 설명했다.] >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 以黑爲父母, 以靑爲身. 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 >『옥룡기(玉龍記)』[* 신라 말기의 승려로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대사]]의 저술이라고 전한다. 물론 정말로 도선대사의 저술인지는 의문이 있다.]에서 이르기를, '''[[백두대간|우리나라(의 지형지세)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형세가 물이 뿌리가 되고 나무가 줄기가 되는 땅으로 흑(黑)을 부모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는다. 만약 풍속(風俗)이 땅을 따른다면 창성할 것이나, 땅을 거스른다면 재앙이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고려사 권제72 지 권제26 여복(輿服)1 관복, 공민왕(恭愍王) 6년(1357) 윤9월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흥필(于必興)의 상소에서 >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 北流爲蘇下江, 東流爲豆漫江. >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그 정상에 큰 못(大澤)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북으로 흘러 소하강([[송화강]]), 동으로 흘러 [[두만강]]이 된다. >----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산림 가운데 태백산, 즉 백두산이 구름 위에 솟아 있습니다. 이 산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나라|청조(淸朝)]]의 시조인 한왕(汗王 누르하치)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명합니다. 그 산 서쪽 비탈에는 그의 옛 집이 보수되어 보존되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을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아주 먼 지방에서 경건한 순례자들이 와서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립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페레올 고 요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에게 보낸 편지 中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1&sn1=&divpage=1&category=7&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5|#]]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로, [[신라]] [[명주]] [[오대산]]을 백두산의 줄기로 소개하는 기사가 2차례 등장한다. 『[[고려사]]』 세계와 [[성종(고려)|성종]] 10년(981)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전 기록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편이다.[* 기록에 따라 [[묘향산]]설, 지금의 [[태백산]]설 등 이설이 있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한다.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추정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에서 보듯 19세기까지도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 모양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 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졸본부여라 하면서 졸본을 요동 인근으로 비정했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백두산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에 있다고 나오나, 이는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추정하여 적은 것이기 때문에 [[부여]]의 실제 위치인 [[만주]] 지역하고는 맞지 않는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다. 부여, 옥저, 신라[* 원문에는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는 동시에, 이승휴 자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요하 근처의 무덤을 현지인들이 '부여 부마 대왕의 무덤'이라고 증언하는 것과, 요하 인근을 부여의 땅으로 기록하고 부여가 후조선[* 기자조선을 말한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현재 남북 학계 모두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저 단군 왕조에서 다른 토착민 계열 왕조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의 후예라고 기록한 가탐의 기록을 실어놓아 요하 일대와 백두산을 부여 영토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암자가 무려 360여 곳이 있었다고 한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시|평양]]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단군]] 문서 참고. 북한의 평양 [[단군릉]] 발굴 및 개건과 남한 [[이승만]] 정권의 [[단군기원|단기]] 사용[* 당시 대부분의 책은 단기를 사용했다. 또한, [[대한민국 환|화폐]]에서도 연도표기를 단기로 사용했다.], [[대종교]]의 단군 숭배와 백두산 성역화, [[단군]] 동상 설립 등이 한국인의 단군 숭배를 보여준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특히 [[청나라]]에서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사실 전통적으로 한민족보다 만주족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산이었다. 순우리말로 백두산은 [[순우리말/지명#s-7|박달, 배달]]이라고 한다.[* 밝달이라는 표기도 쓰인다.][* 달은 산이나 들 등의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이다.] [[파일:lwms.jpg|width=50%]] 삼지연에서 바라본 백두산 조선시대 이전부터 백두산 이외에도 [[장백산]]을 혼용했다. [[용비어천가]]에서도 장백산이라고 언급하며 '백두산'은 별칭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온다. 게다가 북한 [[김일성장군의 노래]]도 첫 소절이 장백산으로 시작한다.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이 이 사실을 몰랐는지 중국 측 편파판정과 장백산이란 표현에 반발하여 우발적인 세리머니를 하여 중국 측과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의 이모저모 부분을 참고할 것.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렸다. 현대에는 '장백산(長白山:창바이산)'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갼 알린(Golmin Šanggiyan Alin)'[* 한자로는 '果勒敏 珊延 阿林 山(과륵민 산연 아림 산)'. 현대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궈러민 산옌 아린 산(Guǒlèmǐn shānyán ālín shān)'.]을 [[번역차용]]한 것으로, [[요나라]]·[[금나라]] 시기부터 쓴 이름이다. 이러한 명칭은 9개월 가까이 눈이 쌓인 특색 있는 산정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이 [[만주어]] 명칭은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 '가이민 상견 아린(歌爾民 商堅 我隣)'이란 [[음차]]로도 기록되어 있다. 음차일 뿐인데 굳이 한자의 훈을 억지로 끼워 맞춘 해석인 '그곳 백성(爾民)이나 장사꾼(商)이 노래하는(歌) 굳센(堅) 우리(我) 이웃(隣) 산'이란 말이 웹상에 떠돌지만, 이는 지행록 역자의 오류인 듯. 지리지인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歌爾敏(가이민←골민)'은 '크다(≒길다)'는 뜻이고 '商堅(상견←샹기얀)'은 '희다'는 말이며 '阿隣(아린←알린)'은 '산'을 말하는 만주어"라고 설명했다. 즉 현대 [[중국]]이 사용하는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니다. '장백산', '백산'은 우리나라가 백두산을 지칭하며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0세기 무렵부터는 중국에서 대부분 장백산, 백산이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도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많이 불렀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지금의 백두산이란 명칭은 그 전에도 쓰이긴 했지만 조선 말기에나 빈도가 높아진다. [[일본]] [[NHK]]에서 [[북한]] 측의 협력을 얻어 백두산 일대의 식생을 50분짜리 자연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백두산은 그야말로 '희고 긴 산'이다. 한국측 미디어에서 대개 백두산 천지를 그려내는 데 비해 이 다큐는 [[삼지연]] 일대의 자연을 담고 있어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백두산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 영어권에서는 백두산이란 이름을 중국식으로 읽어서 'Baitou Mountain'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단 공식 표기는 [[북한]]의 표기인 Mt. Paektu.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