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두산 (문단 편집) == 역사 == [[한민족]]과 [[만주족]]의 [[영산]]으로, 지금도 [[한국]]의 [[애국가|국가]]와[* 애국가 1절에 나온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북한]]의 [[애국가(북한)|국가]]에[* 애국가 2절에 나온다.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모두 등장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중요시함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을 설명하며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42&cid=49616&categoryId=49616|#]])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 기준이자 신앙대상으로서 백두산을 꽤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행교과서상으로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고려)|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고려)|서경]]([[평양시]])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보살|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고려)|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신라)|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에는 [[태종(조선)|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조선)|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3013_002|기록]])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우리나라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조선)|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영조실록]] 43년[1767] 윤7월 신축). 이때 영조의 발언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목극등이 지은 경계선 이야기를 다 듣고도 '[[용비어천가]] 보니까 우리 조상님([[이안사]]) 집이 [[경흥도호부|경흥]]에 있었다는데 거기 백두산 근처 아니냐? 야 아무리 봐도 백두산 우리 땅 같은데? 야 그럼 우리나라 땅이니까 제사 지내야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물론 두만강 하구에 있는 경흥은 백두산과는 300km 가까이 떨어졌으니 시작부터 뭔가 이상한 소리. 당연히 조선에 청나라에 맞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칭제건원]] 얘기가 나올 정도였던 이 무렵 조선 내부의 고양된 분위기에 맞춰 백두산 '''남쪽''' 국경지대의 처우를 높여준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 발언과 무관하게 [[백두산]] 망제를 지내는 장소는 백두산 남쪽의 녹반치(綠礬峙)로 정했다.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125위안으로 비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