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래시(도서) (문단 편집) === [[낙태]] 논쟁과 A.C. 사망 사건 === [[낙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논쟁적이며, 그 중에서도 팔루디는 본서에서 낙태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하는 쪽을 지지하고 있다. 오해가 없도록 첨언하자면, 팔루디 역시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와 같은 신중한 윤리학적 및 생물학적 난제가 개입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팔루디의 관점에서, 80년대 미국의 낙태 논쟁은 그렇게 차분하게 심사숙고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는 않았다. 적어도, 언론에서는 신중한 견해들 위주로 보도되었지만, 정작 낙태 반대 진영은 '''여성에 대한 반감과 울분을 동력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현재진행형인 낙태 논쟁에 관련하여, 설령 낙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런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더 정교하게 업데이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낙태 반대 진영의 이미지는 노년층 [[근본주의]] [[개신교]]인을 연상하게 하지만, 팔루디가 실제로 파악해 본 결과에 따르면 이 진영의 주축이 되는 인구집단은 '''20~30대 저소득층 남성'''이었다. 다시 한 번,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젊고 화난 안티페미니즘 남성들' 과 인구학적으로 대단히 유사했다. 이들은 "태아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와 같은 점잖은 논리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설령 그런 걸 들이대더라도 사석에서는 말이 전혀 달라지곤 했다. 팔루디는 이들이 '''남성들이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할 가부장적 권력이 축소되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녀의 생산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이 "빼앗아갔다" 는 데 불만을 느낀다는 것. 그 근거로서 팔루디가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많은 낙태 반대자들은 겉으로는 "영아살해자" 라고 비난하면서도 사석에서는 낙태 여성들을 [[창녀]]라고 비난했다. 낙태 후 [[이혼]] 소송들의 속기록을 보면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졌다", "아내가 애를 낳으라는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아내가 내 뜻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낙태를 했다", "내가 낙태를 못 하게 하니까 이혼하려는 것이다" 와 같은 하소연들이 빗발치는 걸 볼 수 있다고. 이들은 자녀를 몇 명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통제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The American Spectator》, 《Grand Illusions》 등의 낙태 반대 서적들에서는 그 통제력에 위협을 가한 주체를 '''[[페미니즘]]으로 명시했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성적 자유와 출산 선택의 자유를 주었기에, 생물학적 아버지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낙태와 피임, 혼전 성관계 등을 전면 반대하는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랜들 테리(R.Terry)는[* 그는 본래 독실한 근본주의 개신교인으로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던 빈곤층에 불과했으나, 어느 날 기도실에서 기도하던 중에 낙태 클리닉을 자신이 습격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서 낙태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별 볼 일 없던 그는 갑자기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미혼모 상담센터와 쉼터 등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을 돕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실상 이런 곳들에서는 낙태를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선정적이고 종교적인 홍보 영상들을 강제로 보여주곤 했으며, 그나마 그 서비스를 이용한 미혼모들의 수는 폐쇄 전까지 불과 4명에 지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페미니즘에 [[중립]]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하는 행동은 여지없이 [[안티페미니즘]]적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낙태 반대 운동 역시 '''언론에 의해서 굉장한 특혜를 받아 누렸다.''' [[도미노피자]] 당시 회장이었던 토머스 모나한(T.Monaghan)은 "우리 피자를 주문하면 낙태 반대 시위에 대한 최신 정보가 담긴 전단지를 함께 드립니다"(…)를 [[마케팅]]에 포함시켰으며, [[뉴욕 자이언츠]] 당시 소유주였던 웰링턴 마라(W.Mara)는 〈Champions for Life〉 라는 낙태 반대 비디오를 만들어서 학교에서 시청하도록 배포했다. 낙태 옹호 영화 〈Abortion for Survival〉 의 광고포스터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와 《워싱턴 포스트》 에 의해 "너무 논쟁적" 이라며 게재 거부 통지를 받았으나, 낙태 반대 영화인 〈[[침묵의 절규]]〉 는 여러 텔레비전 네트워크들에서 그 '논쟁적' 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방영이 수락되었다. 하지만 팔루디는 실상 '''미국인들의 여론은 오히려 낙태 옹호 입장이 다수'''였다고 지적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심지어 [[가톨릭]] 교인들의 낙태 찬성론 비율이 백인 저소득 남성층의 찬성론 비율보다 더 높았다고. 80년대 미국 사회에서 낙태 반대론의 특징은, 팔루디에 따르면, 문제를 모체 대 태아의 구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태아의 권리는 온전한 성인의 그것으로 존중하면서도 모체의 권리는 수동적이고 대상화되며 무생물적인 환경으로 여겨 존중하지 않았다. 즉, '''태아는 이들에게 늘 '작지만 사색적인 성인' 으로 묘사'''되었으며, 자궁 속에서 '''늘 외부 세계를 동경하는 지성을 갖춘 존재'''로 그려진 반면,[* 즉 이 사람들은 낙태 반대 운동을 할 때 늘 "어서 빨리 저 찬란하고 밝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얼마나 아름다울까? 엄마! 저를 죽이지 말아요! 저는 바깥 세상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에요!" 와 같은 [[감성팔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낙태 반대 집회에서 동원되는 수사법과 메타포들이 더 궁금하다면 본서의 마지막 챕터를 참고할 수 있다.] 모체는 '''[[자궁|그저 이들이 잠깐 머물다 가게 될 임시 거처]]'''인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법적인 수준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보였다. 1980년대 말에 태아는 실제로 살아 있는 아동에 비해 더 많은 법적 권리를 가졌으며, [[뉴햄프셔]] 주에서는 태아를 보험금 수령 자격이 있는 '세대 거주자' 로 인정했고, [[테네시]] 주의 한 법원에서는 최대 8개의 세포로 구성된 한 냉동 배아가 법적으로 자녀의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기도 했던 것. 그 결과, '''미국 사회는 태아의 권리를 모체의 권리보다 한참 높은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당시 의학회의 문헌들의 권고내용을 보면,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의사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여성들을 체포하도록 제안하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의사의 지시라는 것이 따라서 나쁠 것은 없다지만, 이 시절에 임산부들은 의학적 개입이 불필요할 만큼 작은 위험요소가 있더라도 강제적인 [[제왕절개]] 수술을 제시받는 일이 많았으며, 만일 이를 거절할 경우에는 '''공권력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제왕절개를 거부한 임산부를 신고할 수 있었고, 신고가 접수되면 빠르면 1시간 이내, 늦어도 6시간 이내에 [[철컹철컹|그 임산부는 체포당했다.]] 비단 제왕절개뿐만 아니라, 이때의 미국 사회에서는 임신부가 음주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고 법적 처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임신 중 음주가 도덕적으로 결코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법적 처벌만큼은 '''태아에 대한 모든 종류의 학대가 실제로 '국가가 공권력을 사용해서 개입할 문제' 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고로 이때 있었던 별의별 기막힌 아동(태아)학대죄 사건들을 팔루디가 본서에서 기록하고 있는데(pp.620-621) 그 내용들 중 일부는 가히 '''해외토픽감'''이었다. * [[미시건]]: 한 여성은 [[교통사고]] 후유증을 겪고 있었는데, 임신한 후 진통제를 복용했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다른 여성은 아내가 임신 중에 [[항생제]]를 복용하여 남편에게 고소당했다. 남편의 말인즉슨, 항생제 복용이 태아의 치아 색을 변색시킬 수 있으므로 마땅히 고소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을 심리한 법원은 남편에게 이 상황에 대해 고소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문에서 명시했다. * [[아이오와]]: 한 여성은 임신 중에 [[편식]]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이 여성이 향후 자녀를 성심껏 양육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면서 출산 직후 국가에게 양육권을 빼앗겼다. * [[와이오밍]]: [[가정폭력|남편에게 구타당하던]] 한 임산부 여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경찰에 전화하여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출동한 경찰은, 신고한 여성이 임신 중에 [[음주]]를 한 정황을 확인하자마자, 남편은 그냥 내버려두고 도리어 아내를 체포해 갔다(…). * [[일리노이]]: 임신 중에 [[교통사고]] 차량 조수석에 동승해서 태아를 잠재적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교통사고 가해자 남편의 아내가 아동학대 피의자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 [[메릴랜드]]: 한 임산부는 둘째 자녀를 출산할 병원을 옮겨야 한다는 의료진의 요구를 거부하고 버텼다. 이 여성에 따르면, 그가 병원을 옮길 경우 19개월 된 첫째아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랑하는 첫째아이를 차마 유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 정부가 나서서 이 여성으로부터 둘째 태아에 대한 양육권을 빼앗아 갔다. 낙태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가족계획기금은 80년대에 그 후원금과 보조금이 지속적으로 삭감되어 왔는데,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저소득층 여성들이 피임과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0대 저소득층의 임신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문제를 깨닫고 다시 기금 지원을 재개하기도 했다고. 마찬가지로 낙태 제한은 이들 어린 여학생들의 "[[순결]]" 이나 "정숙함" 을 지켜주기는커녕, 이들에게 위험한 음성적 출산이나 무면허 낙태 시술만을 증가시켰다. 본서에서 제시되는 한 사례로, [[미네소타]]에서는 낙태 제한법이 실시된 후 미성년 여성 출산율이 무려 40%p나 증가했다. 낙태 문의만 하더라도 의사가 직접 신고하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여성들은 자기 집이나 욕실, 주방에서 몰래 출산함으로써 양육권 박탈이나 구금을 피하려 했다. 이 문제가 하도 심각해서 '''"화장실 아기"''' 라는 표현이 생길 정도였다고. 체포당한 여성들 역시, 산모와 태아의 건강이 직접적으로 위험에 처할 만큼 사법 당국의 산전 관리 실태가 열악한 데다, 자녀를 옥중에서 출산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 보충제와 복지 수당은 늘 레이건에 의해 삭감되어 왔다. 일이 이 지경인지라, 팔루디는 이들이 겉으로나마 내세우는 '''"건강한 다음 세대" 라는 명분과 가치가 어디로 갔느냐고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비극적인 사례로 '''베키 벨 사망 사건'''을 들 수 있다. 이것은 [[1988년]]에 [[인디애나]] 주의 17세 소녀 베키 벨(B.Bell)이 겪었던 일인데, 이 소녀는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후 낙태 시술을 알아보았으나, 합법 시술소에서의 낙태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지되며, 부모가 허락하더라도 판사가 직접 승인해야 한다는 (새로 제정된) 부모동의법으로 인하여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결국 그는 위험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사건은 [[1991년]]에 10대 여성 잡지인 《Seventeen》 에서 기사화된 후, 음성적 낙태 시술을 받다가 죽은 소녀의 친구들이나 죽을 뻔했던 경험자들의 독자 편지가 빗발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럼 좀 불편하더라도 법대로 따르면서 부모와 판사를 '설득'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부모동의법 하에서 낙태를 원하는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공개해야 하는 제3자의 수는 '''20명'''에 달했으며, 판결이 나기까지 '''1개월 이상''' 소요되었고, 문제의 [[인디애나]] 주의 경우 연간 사법적 허가는 단 '''6~8건'''에 불과했다고. 팔루디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또 다른 비극적 사례를 하나 더 들자면 세간에 '''A.C. 사망 사건'''이라고 알려진 앤젤라 카더(A.Carder)의 사건이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서 모체의 생명권을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기꺼이 내다버리려 했던]](…)''' 사례라는 것이다. 사건인즉 이렇다. [[1987년]], 희귀한 [[골육종]] 환자인 카더는 임신 중에 뼈에 암이 재발하는 상황에 처했다.[* [[골육종]]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이 암은 뼈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발병할 수 있으며, 일단 발병하면 재발률이 매우 높고, 치사율도 매우 높아서 생명을 걱정해야 할 정도이다.] 의료진은 카더가 태아에게 나쁠 수 있는 화학치료를 요청하자 강제 삽관 및 진정제를 투약하여 의식을 잃게 했으며, 이후 태아가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출생할 경우 [[너 고소|자신들이 고소당할까 두려웠던 의료진은]] 결국 강제로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했다. 제왕절개는 암 투병 중인 카더에게는 치명적인 수술이었지만 환자의 서면 동의는 생략되었으며, 병원측은 날림으로 실시한 제왕절개 법률 심사에서 수술을 일사천리로 승인했다.[* 한 사람이 심사 마무리 즈음에서 혹시나 싶어서 카더에게 물어보았는데, 처음에는 진정제에 취해 있던 카더가 무심코 "Yes" 라고 대답했으며, 30분 후 정말 혹시나 싶었던 그가 다시 물어보자 이번에는 또렷한 정신으로 "아니오, 그런 거 안 할 거야, 나 수술 안 한다고 말해 줘요" 라는 요지로 정확히 발음했다. 그가 이 사실을 법관들에게 전해 주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에 시민단체에서 긴급 항소를 신청하자, 당장 수술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심사는 수술 전까지 16분만 진행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카더 측 변호사들의 변론은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하고 끊겼다.[* 이들 변호사들은 경황 없이 이 사건을 떠안게 되어 다같이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야 했으며, 그나마 관련 송사 경험이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현행법을 인용하면서 청산유수처럼 제왕절개의 법적 문제점을 강조하자 판사가 "짧게 말하라" 면서 매번 말을 끊었다고 한다.] 결국 억지로 강행된 제왕절개 결과, 무리한 수술로 인해 태아도 사망하고 카더 역시 이틀 후 결국 사망했다. 3년 뒤 제대로 치러진 항소심에서는 '''이 심사와 수술 모두 카더의 생명권을 침해했음을 인정했다.''' 이 사례는 피해자의 이니셜인 A.C. 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졸속 심사는 '16분 판결' 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후로도 임산부의 생명권에 관련된 중요한 판례가 되었다. 여성의 출산에 관련하여 이 모든 이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이 있다면, 80년대 미국 사회가 임산부를 사실상 "[[자궁]] 그 자체", 요즘 말로 옮기면 "애 낳는 기계" 로 취급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의 가장 큰 가치는 자녀를 낳는 데에 있었으며, 여성의 권리는 자신이 출산하는 태아의 권리보다 더 적었고, 여성이 자신의 출산 문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의사결정을 내릴 권리는 사실상 없었다.''' 낙태 반대 운동은 단지 그 하나의 양상 내지는 결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팔루디의 취재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자궁으로서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태아보다 자궁을 우선시하는 사회가 자궁보다 태아를 우선시하는 사회에 비해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인구증가를 보일 것이라는 직관적인 생각에 반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로이 바우마이스터(R.Baumeister)가 자신의 저서 《[[소모되는 남자]]》 에서 우리 사회가 음경 과잉(penis surplus) 현상, 즉 남성들의 목숨은 얼마가 죽어나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재생산 능력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다. 하지만 팔루디의 판단에 따르면, 당시 미국 사회는 인구증가의 잠재력을 일부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여성들에게 '''출산 문제에 대한 권리만큼은 넘겨주지 않으려 했던''' 남성들의 백래시로 설명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