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래시(도서) (문단 편집) === 그래서 [[백래시]]란 무엇인가: 역사와 양상 === 백래시의 정의는 본서를 절반 넘게 읽어야만(…) 9장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이 책이 백래시의 양상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시모어 립셋(S.M.Lipset)과 얼 랍(E.Raab)은 《The Politics of Unreason》 에서 백래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들에 따르면, 백래시는 '''"자신들의 중요도,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집단에 의한 반동"'''(p.29-30)이라고 하며, 또한 미국에서 "절망의 정치는 전형적으로 반격의 정치"(p.3)라고도 하였다. 로절린드 페체스키(R.P.Petchesky)는 자신의 논문에서[* Petchesky, R. P. (1981). Antiabortion, antifeminism, and the rise of the New Right. Feminist studies, 7(2), 206-246.] 70년대 페미니즘은 보수주의자들의 가치나 이해관계 외에도 '생활양식' 까지 위태로워지게 만들었던 중요한 위협요소였다고 지적하면서 백래시가 주로 [[보수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백래시가 그 자체로 보수주의와 정확히 상통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는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Adorno)는 현대의 우익 운동 세력이 '사이비 보수층' 으로 고전 보수주의자들과 달라지며, 자신들이 현 상태의 지배질서를 수호하기보다는 철 지난 옛 질서나 상상 속의 질서를 복원하려 한다고 보았다. 또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R.Hofstadter) 역시 자신의 저서 《The Paranoid Style》 에서, 이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아웃 오브 안중|미국은 대체로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고 말함으로써 이들이 사회의 주변적 세력임을 확인했다. 백래시가 태동한 가장 중심적인 집단은 다름아닌 '''[[뉴라이트]] 및 [[개신교]]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본주의 개신교계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됨" 이라는 에베소서 5장 22-24절을 어찌나 자주 거론하는지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 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특히 70년대 말에 갑작스럽게 청중이 감소해 가던 개신교계 텔레비전 설교사들이 가장 열정적인 백래시 홍보 집단이었다. 폴 웨이리치(P.Weyrich)나 제리 폴웰(J.Falwell), [[팻 로버트슨]](M.G.Robertson) 등은 "Moral Majority", "Committee for the Survival of a Free Congress", "American Christian Cause", "Christian Voice", "700 Club" 등등의 자신들의 이익단체 및 압력단체를 구성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어려움의 책임을 페미니즘으로 돌렸으며, 심지어 [[음모론]]도 공공연히 활용했다.[* 제리 폴웰의 서적 《Listen, America!》 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전세계적인 비밀 조직망을 구축한 상태로 자유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정부 네트워크에 이들을 침투시키게 된다는 것.] 특히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임스 로비슨(J.Robison), 팀 라헤이(T.LaHaye) 등의 "[[목사|목사님]]" 들은 설교 시간에 자신들의 폭력 전과를 공공연하게 자랑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이 시절은 대통령 후보들조차 [[마초]]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투명드래곤|내가 한번 화를 내면 아랫사람들 모두가 무서워서 꼬리를 말고 도망칩니다!]]" 라고 방송에서 호언장담하던, 그야말로 싸나이들의(?) 시절이었다. 저자가 인용한 립셋과 랍의 문헌에 따르면, '''백래시는 역사적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역사를 되짚어 본 에이드리언 리치(A.Rich)와 같은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이 있다면, 이 또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페미니즘은 '''[[19세기]] 중반, 1900년대 초, 1940년대 초, 1970년대 초'''에 네 번 크게 나타났으며, 그 사이에는 각각 백래시가 나타났다. 잠깐 간단히 예를 들어 보자. 엘시 파슨스(E.C.Parsons)라는 사람은 "[[미국|우리나라]]에 한때 [[성차별]]이 존재했음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박물관]]을 만들 때가 왔다" 고 주장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한 때는 '''[[1913년]]'''이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에델 클라인(E.Klein)의 《Gender Politics》 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여성운동에 대한 관심의 약화는, 여성들의 실패가 아닌 완성의 신호" 라는 인식이 언젠가 퍼져 있었으며, "페미니즘은 이미 제 역할을 다 했고, 이제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시대가 왔다" 는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클라인이 묘사한 시대는 '''[[1920년대]]'''였다! 미국인들은 "페미니즘은 이제 그 목표를 완수했고, 페미니즘 이후의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는 '똑같은 생각' 을 80년대까지 총 네 번씩이나 반복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80년대 남성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해서 "다 안다" 는 듯한 냉소주의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페미니즘? 그거 이미 철 지났지,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니까" 등으로 비아냥거렸다고. 백래시를 옹호하는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메시지들을 낡은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농담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후손들을 위한 한 가지 힌트가 있다면, 이 모든 케이스에서는 공통적으로 '''"여성에게는 질문도 안 해 보고 남성들끼리만 쑥덕거린 끝에 내린 결론"''' 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첫째,''' 19세기 중반에 부흥했던 페미니즘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E.C.Stanton), 수전 앤서니(S.B.Anthony)의 세네카 폴스(Seneca Falls) 선언에 대한 백래시를 맞이했다. 이때는 '상류층 독신 여성' 이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이들이 외설적이고 무분별하며 수많은 가정들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둘째''' 백래시로서, 1920년대에는 [[대공황]]과 [[반공주의]]가 나타나면서, 전미여성당(National Woman's Party)과 헤테로독시(Heterodoxy)의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이 나타났다. 반대자들은 전미여성당은 곧 [[빨갱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곤 했으며, 1차 대전을 계기로 직업활동에 참여하게 된 여성들에게 그만하면 됐으니 부엌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1950년대에 '''세 번째'''로 나타난 백래시는 1940년의 저 유명한 "[[https://en.wikipedia.org/wiki/Rosie_the_Riveter|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의 "We can do it!" 이미지에 대한 것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의 근면함에 갈채를 보내던 언론들은 1950-60년대에 태도가 돌변, "근무태도가 불량하다" 고 비난했으며, 윌러드 월러(W.Waller), 벤저민 스포크(B.Spock), 한때 자신이 페미니스트였던 마거릿 히키(M.Hickey) 등이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이 버릇이 없어져서 이혼과 미성년 범죄, 불임, 사회적 불안이 초래되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미국 사회는 80년대 들어서 '''넷째''' 백래시를 맞게 된 것. 언제나, 백래시의 핵심 메시지는 __'''"이번에야말로 여성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여성들은 비참해졌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라"'''__ 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따라서 여성들의 불행에 대한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으로 [[페미니즘]]을 지목했다. 그런데 실상 이들은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는 전혀 물어보거나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여성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중매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직장 여성들은 괴롭습니다! 가정주부는 행복합니다!" 를 외쳐대는 걸 보면서 자신도 불행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처음부터 여성들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던 셈이 되었다. 백래시로 인해 여성들은 고립감과 우울감을 경험했고, 백래시는 이에 대해 "페미니즘이 너무 나갔다, 너무 빨랐다, 너무 이상적이었다" 고 홍보했으나, 실상 여성들은 바로 그 백래시 때문에 공연한 우울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대중매체는 백래시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백래시의 조력자이며 동시에 홍보 담당자였다. 사실, [[사회자유주의|리버럴]]들의 세상이었던 1970년대에도 언론은 페미니즘의 동지라고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초에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가,[* 예외적으로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당시 일부 시위대가 [[브래지어]]를 쓰레기통에 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것 하나로 3개월 동안 온 언론사들이 "브래지어를 불태우는 화난 여성들" 이라며 보도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은 이어져서, 미국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 중 유명한 것으로 브래지어를 불태운다는 이미지가 있다고.] 70년대 중엽에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폭발적으로 호응하자 이번에는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적당히 끌어와서 자기네 상품을 팔아먹는 데 동원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저자 팔루디가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자본주의]]에 의해서 강탈당하고 있다는 것. 이런 문제의식은 크리스토퍼 래시(C.Lash) 같은 역사학자나, 니나 파워(N.Power) 등의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 이후 백래시의 시대인 80년대가 되자, 이번에는 '''"이제 페미니즘은 끝났다, 페미니즘은 죽었다, 그들이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이들은 여성들의 불행을 주제로 할 때 여성들의 목소리를 취재하는 대신, 여성이 우울해하는 일러스트 몇 장(…)을 그려넣었을 뿐이었다. 기사 본문에 [[관계자|익명으로 인용된 여성 서너 명의 말 한 마디씩을 추가하고]], "감이 있다" 혹은 "더욱" 과 같은 모호한 표현을 쓰고, 미래시제를 활용하여 예측적인 진술을 하거나, 다른 언론사의 여성 트렌드 기사를 베껴오고, 일부 대중강연 전문가들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완벽했다. --요즘 인터넷 뉴스도 똑같다고 생각되어도 일단 넘어가자.-- 언론은 이때 "직업여성들이 불행해지고 있다" 는 기사 한편으로 '''"점점 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는 기사를 나란히 두었다.''' 이를 종합할 경우 여성들은 헛된 욕심에 빠진 채로 자기 자신을 불행해지는 길로 몰아가고 있다는 식의 분석이 나오는 셈. 1986년에 신문 기사들은 "성별 임금격차가 사라지고 있다" 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낡은 통계수치를 그만 인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해의 [[임금격차]]는 1955년의 임금격차에서 떨어졌다가 원상복구된 것이며, 그나마 [[통계적 방법]]을 보정하고 남성임금 저하분을 배제하자 격차 감소는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많은 언론들은 또한 "여성들이 점차 금녀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 고 보도했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비서, 청소, 간호, 리셉션 등의 주변적 업무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나, 그 직종의 임금이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어서 남성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채운 결과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1989년에 《포브스》 는 오늘날 기업 내 [[성차별]] 처벌 건수가 크게 감소했다며 반겼지만, 레이건 행정부가 성차별 문제를 감시, 징계, 중재할 부서들을 지속적으로 감축시키고 약화시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하지 않았다. 특히 이때 언론사들이 폭넓게 활용한 [[신조어]] 중 하나를 소개할 만하다. 광고 카피라이터 페이스 팝콘(F.Popcorn)은 [[1986년]]에 "고치 짓기"(cocooning)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본래는 [[히키코모리]]를 의미하는 젠더 중립적인 의미였지만, 언론은 무분별하게 이를 가져다가 "일을 그만두고 가사노동을 하며 행복해하는 여성들" 이라는 의미로 전용했다. 정작 팝콘 본인부터가 행복한 미혼 [[워커홀릭]]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 사실 이러한 양상은 [[1980년대]] 초엽의 불황기에 '''경영악화를 경험하는 언론사들'''이 컨설팅을 받으면서 "요즘은 전통적 메시지가 먹혀드는 시대이니, 이에 영합하는 기사를 쓰면 구독자들이 좋아한다" 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도 있다고 한다. 그 사례 중 극단적인 것을 하나 든다면, 한 언론사는 아침식사용 [[시리얼]] 판매량이 5년 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경제 기사를 가지고 [[견강부회|"따라서 일하는 여성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고 기사를 끝맺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백래시는 [[영화]]에서도 나타났는데, 70년대 영화들은 〈Up the Sandbox〉, 〈Private Benjamin〉, 〈My Brilliant Career〉 등에서 보듯이 자기 목소리를 과감하게 낼 줄 알고, 부당한 일에는 남편에게 뺨을 때리거나 항의할 줄도 알았던 능동적인 여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묘사되었으며, 탈진해 버린 직업여성들의 실패와 백치스럽고 의존적인 여성의 행복이 대조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반대로 모성에 대해서는 매혹적이고 신성하게 묘사하며, 〈Three Men and a Cradle〉 의 경우 남성들이 얼마나 아기를 못 돌보는지 (따라서 왜 엄마들의 보육이 필요한지)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다. 이들은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장면들을 삽입했고, 남녀 간에 갈등이 벌어질 경우에도 화해와 관계의 개선으로 마무리되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승리" 혹은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대에 여성들의 입을 막은 주요 작품들로는 〈Overboard〉, 〈Nine Half Weeks〉, 〈The Untouchables〉 등이 있다고. [[TV]] 브라운관에서도 변화는 감지되어서, 남성 등장인물들은 점점 [[마초]]적이게 되었고 여성들은 점점 더 "[[비키니]] 차림으로 해변에서 뛰어노는 헐벗은 소녀들" 이 되어 갔다. [[1988년]]의 〈Angels' 88〉 에서 나타난 [[성 상품화]] 외에도, 〈Nasty Boys〉, 〈Hardball〉, 〈Moonlighting〉 에서는 억세고 우악스러운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백래시는 유독 TV에서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주 시청자층이 결국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의 선호에 따라 강인한 캐릭터를 보여줘야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 수 있었다는 것. 예컨대 당시 여성들은 〈Roseanne〉, 〈Murphy Brown〉 등에서 등장하는 [[독설가]] 유형의 등장인물에 열광했지만, [[조지 부시]]는 그 주인공 로잔느 바(R.Barr)에 대해서 "수치스럽다, 그녀를 [[이라크]]에 대적할 비밀 무기로 만들면 좋겠다" 고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아무튼 그 결과 TV 프로그램들은 유독 페미니즘과 백래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대중이 [[레밍]]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전방위적 선전이 대중에게 그만한 호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는 [[심리학|남성들의 심리]]의 영역으로까지 내려가서 분석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이런 남성들의 반감을 목도하며 몹시 당혹스러워했지만, 한 학문에서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것이 다른 학문에서 쉽게 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정도의 즉각적이고 격렬하며 방어적인 반응은 그것이 자기위협(self-threat), 즉 자기개념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성 역할|남성으로서의 역할]]이 남성들의 자기관(self-view)에 있어서 너무나 근본적인 탓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심리적으로 이들의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학계에서 크게 논의되지 않은 사변적 추론임에 유의.) 그러나 사회학은 이런 학문들과는 분석 수준이 다르기 때문인지, 유의미한 협업이 이루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뉴라이트]] 세력의 면면으로 미루어 본다면, 어쩌면 백래시는 남성들이 생각하는 남성성(masculinity)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남성성의 위기" 담론'''이 역사적으로 백래시 때마다 늘 제기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H.James)는 자신의 작품들에서 "요즘은 남자나 여자나 계집애가 다 됐다" 고 개탄했으며, 빌리 선데이(B.Sunday)는 "우리 기독교가 마초적이지 못하다" 면서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 말의 사람들이다.''' 사회학자 시어도어 로작(T.Roszak)은 이 시기를 가리켜서 "만취한 남성들끼리의 긴 파티가 역사책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것 같다" 고 했다(…). 둘째 백래시 때에도 어떤 사람이 나서서 "어린 소년들이 소녀처럼 굴지 못하게 만들어 놓겠다" 고 큰소리를 쳤으며, 그 결과 우여곡절 끝에 창설된 것이 [[보이스카우트]]였다. 셋째 백래시 때에는 소설가 필립 와일리(P.Wylie)가 자신의 작품들에서 "여성의 왕조에 맞서 싸워서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오자" 고 독려했으며, 넷째 백래시 때에는 제리 폴웰과 랜들 테리(R.Terry) 등의 '목사님' 들이 "우리 [[예수]]님은 우락부락하고 야성적인 군인 같은 분이셨다!" 고 TV에서 설교했고, 실제로 80년대 남성 패션계에는 《뉴스위크》 가 '포식자 패션' 이라고 부른 공격적이고 거친 이미지의 옷차림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네 차례의 백래시 모두, 그 메시지 속에는 "고추 달린 싸나이 대장부가 어딜 계집애같이..." 라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페미니즘의 그림자만 드리워져도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말살되는 듯한 위협과 고통을 겪는다" 고 지적하면서, [[사회조사]] 연구소인 얀켈로비치 모니터(Yankelovich Monitor)의 수석 연구원과 대담을 나눈 내용을 거론한다. "남성성을 [[정의]]해 주세요" 라고 이 연구소가 20년 동안 종단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어느 시대에나 남성들은 제일 먼저 '''"가족을 잘 먹여살리는 능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 을 들었다. 즉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은 남성들이 남성이기 위한 조건, 가족을 먹여살리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것을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위협하기에 남성들이 격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일을 하면 남편은 남자도 아니라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경제적 [[양극화]]와 불황이 겹쳐지면 백래시에는 최적의 환경이 된다.''' 설문 응답 패턴 속에서 [[30대]]초 저소득 미혼 남성들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낙오자' 라고 소개했고, 여성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80년대 말엽 인구학적 대표성이 보장된 한 데이터에서는 이들이 전체 응답자 표본의 '''20%'''를 차지했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의 사회적 불만과 분노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그 분노가 향하는 집단 속에서 [[여성]]을 [[희생양|누구 하나 끄집어낸 뒤 쫓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양극화가 문제가 되자, 캐런 밸런스타인(K.Valenstein)과 같은 여성 CEO들이 월가의 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쫓겨났다. 부의 세습이 문제가 되자, 리오나 헴슬리(L.Helmsley)가 조세회피를 이유로 '마녀', '창녀', '인류의 수치' 라는 표현을 들으며 몰락했다.[* 참고로 이 비난에 제일 앞장섰던 인물이 다름아닌 [[도널드 트럼프]]였다고 한다.] 군납비리가 문제가 되자,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펜타곤]]은 여성 장교들이 임신을 해서 전투력이 저하된다는 주장과 함께 여성들을 군문에서 쫓아냈다. 레이건 정부의 외교 참사로 꼽히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벌어지자, 올리버 노스(O.North) 대령은 '오만한 페미니스트들' 에게 --어떻게든-- 그 책임을 돌렸다. 남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희생양들은 거꾸로 여성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일부 여성들은 백래시의 메시지가 옳다고 믿고,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자기 일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자녀를 대여섯씩 낳으며 부엌데기로 일하는 요조숙녀처럼 지내 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지독한 [[우울증]]과 권태기, 그리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겪은 여성들은 뉴라이트의 낙태 반대 메시지를 굳게 믿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자녀를 낳은 뒤, 그 길로 이혼 수속을 밟기도 했다. 페미니즘이 낙태를 허용한 결과로 더 많은 이혼이 발생했다는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뉴라이트는 도리어 여성들이 도저히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남성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가정폭력|매일같이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런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믿다가 그만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학대 여성들 중 일부는 살려달라고 신고했다가 정숙한 아내로서 제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공권력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본서에는 이런 안타까운 사례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다. '''적어도 여성의 행복이라는 면에 있어서, 백래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본서 마지막에 정리한 결론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반격은 아무리 [[가부장제|아버지를 섬기는 케케묵은 핵가족 환상]]을 입이 닳도록 칭송해도 다시 그것을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성혐오|많은 여성들의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성가신, 심지어 고통스러운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1980년대에 여성들이 비참했다면 (많은 여성들이 비참했던 건 분명했고, 반격이 심화될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힘들어졌다) 그건 널리 알려진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페미니즘, 그리고 이와 함께 찾아온 자유는 여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 > 반격이 여성에게 쥐어준 행복의 처방전은 효과가 없을 것이고 없을 수밖에 없다. 이는 여성의 삶을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개의 반쪽짜리 삶으로 갈라놓은 뒤 가정만이 충족되고 완전한 존재 양식이라고 홍보했다. 여성들이 이 처방에 저항하면 심리적, 물리적 처벌을 통해 여성들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반대로 이 처방에 따르려고 노력한 여성들은 그것이 현대의 삶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잘못된 치유법(반은 환상이고 반은 처벌인)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반격의 처방은 '''단 한 번도 유효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항상 부실한 대체재였을 뿐이었다.''' 반격의 처방은 수 세기 동안 여성들이 누차 제시했던, 그리고 항상 사회가 바로잡고자 했던 열망과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한 번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 ----- > - 본서, p.65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