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석(시인) (문단 편집) === 김영한([[김자야]]) ===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법정(승려)|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김자야]])이다. 길상사 시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당시 김영한와 백석과의 일화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김영한의 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아오야마가쿠인]]에 유학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자야|김영한]]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릿집|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승려)|법정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돈으로도 1,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어서, 1987년 처음 제안을 받은 법정스님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김영한이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법정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시주를 받아들여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절(불교)|사찰]]로 개조한다. 그리고 김영한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 등의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뮤지컬)|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김자야|김영한]]이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의 주변인들은 김영한과 백석의 교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여인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백석이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의 여동생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김영한이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학교]]는 말년의 김영한을 [[내사랑 백석]]을 내도록 독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