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석(시인) (문단 편집) === 출생~오산학교 시절 ===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지면 익성리(현 정주시 오산동)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 자는 용삼(龍三), 이후 백영옥(白榮鈺)으로 개명했다.]과 어머니 [[단양 이씨]] 이봉우(李鳳宇)[* 종3품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지낸 이양실(李養實)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백협행(白協行)·백상행(白祥行), 여동생 백현숙(白賢淑)이 있었다.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일보]]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하면서 사진반장을 지내다 낙향했다.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 이전 편집 버전의 오산중학이라는 명칭은,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고등보통학교]]가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난 뒤의 명칭이다. 백석 재학 당시 교명은 ‘오산고등보통학교’였다.][* 참고로 화가 [[이중섭]]은 백석의 후배이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 없었겠지만. 다만 백석의 시를 감명 깊게 읽긴 했다.]로 진학한다. 장난꾸러기 같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당시 오산학교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는데 백석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학교|오산고보]]에 재학했던 김소월을 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 나중에 백석은 <여성>이라는 잡지에 소월의 습작 <제이 엠 에스>를 지면에 싣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답게 [[일본어]] 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또한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 1924년 백석의 입학 당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후략)||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백석은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가,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교육과|영어사범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다. 당선작은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려낸 <그 모(母)와 아들>. 조숙한 솜씨로 인간 욕망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당시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학전문학교[* 당시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 성적 10등 안에 들면 무시험 입학이 가능했다.]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는데,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고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 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의 지원[* 1929년 12월 10 탈고한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 문예에 당선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초 방응모가 장학금 월 60원을 지급하게 된다.]을 받아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아오야마가쿠인]]은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스쿨]]이었기에 [[일본 정부]]의 지원금이 매우 적어서, 학비가 비쌌다.]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아오야마가쿠인]] 영어사범과에 다닐 수가 있었다. 아오야마가쿠인에서 백석은 공부에만 전념하며 어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학년 [[영어]] 마스터, 2학년 [[프랑스어]], 3학년 [[러시아어]]를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교내의 교회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오야마 학생들에게 경이감을 선사할 정도로 유창했다 한다. 정작 영어사범 전공이면서도 정식 수업은 [[독일어]]를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무척 아끼며 애제자로 여겼다 한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수많은 번역에 집중하였고, 이때는 주로 러시아 문학에 집중했고, 일부 프랑스 문학, 중국 문학도 번역했다.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 그중 가장 못하는 것이 [[일본어]]였다는데, 일본에서 유학했던 양반이다. 이렇게 공부한 후 졸업 즈음, "최우등은 백석일 것"이라는 믿음이 동기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나 실제 최우등상은 일본인 동기 모리가 받았다고 한다. 졸업식 답사도 물론 모리가 했다고. 백석의 거주지는 한때 [[기치조지|길상사]]로 잘못 알려졌으며, 이에 대한 오인으로 인해 실제 [[길상사]]라는 [[절(불교)|절]]이 지어지게 된다. 백석의 거주지가 길상사로 알려진 것은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도쿄]] 길상사 1875 번지[* [[아오야마가쿠인대학]]까지 차로 30분 거리]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이는 훗날 공식적 문서를 통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길상사]]는 "나는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던 김영한([[김자야]])이 말년에 전재산 1,000억원을 기부하여 지어진 절의 이름으로, 길상사라고 잘못 알려져 있던 백석의 거주지를 참고해 절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석의 일본 거주지로 알려져있던 [[기치조지|길상사]][* [[에도 시대]]에 스이도바시 근처에 있었던 '스와 산 기치조지'(諏訪山吉祥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나, 실제 절은 아니다. 스와산기치조지가 화재로 유실되고 근처 살던 사람들 소개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와 지명을 기치조지, 즉 길상사로 지었다 한다.] 역시 실제 절 이름이 아니다. 2014년 백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세기 시인에 연구 결과에 따라, 일본 유학 당시 백석의 정확한 실제 주소가 알려지게 된다. 실제 백석의 3학년 시기 거주지는 [[도쿄]] 센다가야 정(町) 167, 조일옥(朝日屋)[* 현재의 [[시부야구]] [[신주쿠 교엔]] 근방. [[아오야마가쿠인대학]]까지 대충 걸어서 20~30분 거리.]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확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