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석(시인) (문단 편집) === 아오야마가쿠인 졸업 이후~[[8.15 광복]]까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ekseok_Gihaeng.jpg|width=100%]]}}} || || '''신문에 실린 백석의 모습 (1937년)''' ||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한 백석은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의 제안에 따라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 교정부에서 근무하며 계열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그리고 신문에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한 외국 문인들의 수필을 번역해 싣고, 2편의 단편소설을 연재한다. 백석의 단편은 삶의 어두운 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었는데, 결국 구체성을 가진 소설을 접고 성격에 맞는 시 부문으로 돌리게 된다. 백석은 신문사에서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로 통했다. 남들이 20~3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1원이 넘는 양말을 고집했고, 최고급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기질 탓에 그날 입을 옷 한 벌, 양말 한 짝도 허투루 고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백석이었다. 지저분한 식당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전화를 받을 때는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서 통화했다. 주변에서 힐난의 눈치를 보내면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대꾸했다. "얼굴색은 거무스레했는데, 스타일은 여간한 모던보이가 아니었다"고, 문학평론가 백철은 나중에 쓴 글 <1930년대의 문단>에서 회상했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해 드디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출판부로 자리를 옮겨 잡지 <조광> 창간에 참여해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백석은 <조광> 창간호에 수필 「마포」를 발표했다. 잡지 편집자로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1936년 1월 20일, 백석은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첫 시집《사슴》을 자비로 간행하였다.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당시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내던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서평을 실었다.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라면서도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평했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 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선광 주식회사 혹은 선광인쇄 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2014년에는 온라인 경매가가 5,500만원부터 시작되어 7,000만원에 낙찰되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52755|기사]]. 낙찰자는 장인제약 지경환 대표 [[http://munhaknews.com/?p=5128|기사]]] [[신경림]]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 [[6.25 전쟁]] 와중이라 수많은 장서들이 헐값에 매매되던 시기이다. 당연히 신경림도 장서 더미 속에서 <사슴>을 발견, 참고서 1권 가격 정도에 샀다고 한다.]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부]] 치하 집이 압수수색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 적고 다녔다고. 당시 <사슴>이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많은 문인 및 팬들이 필사본을 만들어 애독하거나 선물했다고 한다. [[노천명]]의 시 <사슴> 역시 백석의 별명이기도 한 <사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집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두꺼운 흰색 표지에 내지와 본지 모두 전통 [[한지]]를 사용하였고, 자루매기[* 종이의 한 면에 두 페이지를 인쇄하여 반으로 접어 한쪽을 실로 묶는 방식. 단면으로 보면 자루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방식으로 양장제본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싼 책의 대부분을 증정용으로 썼다. 일단 출판기념회에 회비 1원을 내고 참석한 손님들 모두에게 친필 서명한 <사슴> 20여권, 그리고 몇몇 학교 도서관에 증정, 참석 못한 친우 및 선배들에게 또 증정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서점에서는 찾아볼래야 볼 수 없었던듯 하다. 표지는 [[정지용]]의 시집이 출간된 것을 보고 백석도 따라 아무 그림 없이 두꺼운 하얀 표지 위에 <사슴>이라고만 썼다. 1937년 백석은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에는 2년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1938년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시]]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 現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하게 된 백석의 업무는 측량 보조원이었다. 당시 국무원은 대(大)신경 건설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측량사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특채로 들어간다. 백석은 사범학교에 이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도 러시아어를 배웠다지만, [[통역]]을 직업으로 삼은 만큼 러시아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백석은 러시아 마을에 머물며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낮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통역으로, 밤에는 관성자에서 러시아어 습득에 매진하던 백석은, 시간을 쪼개 [[테스]]까지 완역한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하였다. 1940년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에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후 [[평안북도]] [[신의주시]]로 귀국했다가, 고향 [[정주군]]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즉 북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갔고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출판금지 대상이 됐다가, 1988년 [[납북]]·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되며 문학사에 복귀했다. 이후 백석의 시는 시선집이 처음 나온 이래 문단과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활발히 조명되기 시작한다. 해금 이후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600편이 넘는 것만 봐도 그 관심을 알 수 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005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대에도 관심이 지속되며,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문학전집>(총 2권)이 발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