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용성 (문단 편집) == 3.1 운동 == 경술국치 이후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되찾자고 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리는데 그러다 임철호 한 분만이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후에 자기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사람이 불심도문 스님이다. 이후 관리들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종교계로 눈을 돌리는데 불교는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세가 약했고 그래서 당시 동학의 후신이자 최대 종교조직이었던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를 찾아간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고 또 그 지도자 중 전봉준, 김개남과는 달리 살아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 그러나 아무래도 전과가 있고 자기 휘하의 수많은 신도들이 있어 주저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용성의 은사 스님인 혜월스님이 예전에 남원의 덕밀암에 있으면서 동학교주 [[최제우]]를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33천에서 따온 의미로 33명을 대표로 하기로 하고 불교 11명, 기독교 11명, 천도교 11명을 하기로 한다. 이때 실질적인 행동은 [[한용운]] 스님을 시켜서 하고 스님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설득하러 다녔다. 그런데 기독교측에서 당시 서로 다른 파로 나뉘져 있었는데 같이 못 하겠다고 하여 설득하고 당시엔 아주 작은 조직이었던 기독교에 배려를 해주며 불교의 인원을 줄이고 불교 2인(용성, 용운), 기독교 20인(두 파가 10명씩), 천도교 11명씩하여 33인을 결성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인원 비율은 정확하지 않다.천도교 15, 기독교 16 불교 2 라는 곳도 있음.] 원래 계획은 선언문 낭독 후 해산이었으나...그렇게 될 경우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미흡할 것으로 판단, 여종업원을 시켜 겉옷과 신발을 숨기고 제자 동헌 스님을 시켜 종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이렇게 봤을 때 [[3.1 운동]]의 핵심인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