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인제 (문단 편집) == 행적 == 1899년 1월 28일(음력 1898년 12월 17일)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남서면 이리(현 [[정주시]] 남양리) 부호마을에서 [[부자|부호]]였던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응모(韓應模)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60100016|#]] 친동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붕제]]가 있으며, [[백낙청]]이 조카다. 고조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974|백경해]](白慶楷)는 종2품 [[한성부]] 좌윤(左尹)[* 현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해당한다.], 증조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392|백종걸]](白宗杰)은 정3품 병조 참의(兵曹參議)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백인제는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 재학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오산학교 졸업 후에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경성의전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10개월 옥살이를 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출옥 후 [[조선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에 힘입어 복학하여 결국 전학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2년을 부수(副手)[* 조수(助手)보다 아래 직급.]로 근무하고 나면 의사 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조선총독부]]부속병원에서 [[외과]] [[마취]] 부수를 하며 마취 기술을 익혔다. [[마취과]] [[전문의]]가 따로 없던 시절이라 마취는 외과 의사한테 중요한 작업이었고, 여기서 익힌 마취 솜씨는 나중에 그가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건 조선인으로서는 그가 3번째다.] 학위 논문 제목은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재검색'이었다. 같은 해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재직 중이던 1930년과 1936년, 두 차례, 약 2년에 걸쳐 [[독일]] [[베를린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931|#]] 경성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 시절의 [[일본인]] 스승 우에무라 슌지(植村俊二)가 경영하던 [[외과]] 의원을 인수하여 위탁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1941년에 경성의전을 사직하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정식 개업하였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1946년까지 5년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백병원]]을 창설했고 1946년 10월 경성의전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될 때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 교수를 맡는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여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납북기록 6.25 사변이 나자 신변의 위급을 느껴 당일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3가 22번지 친우 박씨 댁에 은신. 1950년 7월 19일 오전 5시경 피신해 있던 곳에서 사복한 공산당정보원(30세 미만) 2명에게 체포되어 시울시 남대문통 현 국립도서관(당시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음. 정치보위부와 서대문형무소에 동거하던 권씨 말에 의하면 白은 2주간 보위부에 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함. UN군의 인천상륙과 동시에 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약 3,000면 가량되는 전원을 몇 부대로 나눠 낮에는 수풀과 건물 속에 숨기고 밤이면 보행을 계속 시켰는데 그때 오행히 기회를 얻어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함. 전기 권씨 말에 의하면 백박사는 자기와 같이 그 행렬 중에 섞여 동두천이라는 38선 가까이까지 간 것을 증언하였음(이 권씨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의 한 사람). 서울대학 교수 나세진 박사가 이북에서 넘어온 교환포로 신체검사 당시 들은 바에 의하면 백 박사는 대단한 감시하에 강제로 환자 진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 자기도 진료 받은 일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함.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21&num=7351|#]]] 하지만 출생시기를 고려하면 처형되지 않더라도 사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