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일천하 (문단 편집) == 몰락 == 영국, 프로이센 등은 다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나폴레옹도 이에 맞서 [[벨기에]]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작년에 고갈된 인적자원이 한 해 만에 회복될 리 없으므로 병력을 아껴야 했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12만과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9만을 분단시켜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리니에선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추격에 지체하는 바람에 결정타를 먹일 기회를 놓쳐버렸고, 콰트르브라에서 네와 싸운 웰링턴 군은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수습하면서 브뤼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결국 나폴레옹은 6월 18일에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된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에서 퇴위했다. 한때 나폴레옹은 [[미국]] 망명을 시도하려고 항구도시였던 로슈포르로 오지만 영국 해군이 연안을 봉쇄하면서 실패했고, 프로이센의 추격과 루이 18세의 체포명령이 도피중인 그를 추적하자 바다에 있던 영국 해군의 전함 [[애러건트급 전열함|HMS 벨레로폰(3급함, 74문)]]에 승선하여 미국으로의 무사통과 혹은 영국으로의 망명을 부탁했지만 영국은 둘다 거부했고 그가 타고있던 전함을 일단 본토로 소환후 플리머스 항에 2주정도 상륙없이 계류시키면서 나폴레옹의 신병처분문제를 고민한 후, [[테메레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바꿔태워 콕번 제독[* 영국 해군의 제독(소장)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의 제1대 총독으로 재직중 1816년 4월 허드슨 로우 장군과 교대했다. 기록상으로는 그는 나폴레옹에게 나름 예우를 해준 인물로 나폴레옹도 그에 대해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의 지휘하에 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냈다.[* 이때 미국에 망명했으면 우호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 등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전에 1799년 획득한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으면 "뉴 프랑스"란 이름으로 다시 발악을 해보지 않았을까? 란 이야기도. 다만 2년전에 [[미영전쟁]]이 있었기에 쉽지는 않았을 듯.] 결국 나폴레옹은 죽을때까지 [[세인트헬레나]] 섬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퇴위할 때 칙령을 내려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한 당일 정권을 인수한 5인의 정부 위원회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위원회는 즉각 루이 18세의 귀국을 요청했고, 7월 8일 루이 18세가 파리가 도착하여 복위식을 가졌다. 관례적으로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한 날인 7월 8일, 혹은 그 전날인 7월 7일까지 백일천하라고 지칭하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6월 22일에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프랑스 제1제정 2기는 6월 22일까지 거의 딱 석달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 상원은 나폴레옹이 퇴위한 당일 긴급 회의를 열어 프랑스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다. 한편 이 때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이 첫 퇴위를 할 때, 나폴레옹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조건으로 장인인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국왕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복귀한 뒤에도 그와 협력하지 않았다.다만 외젠이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보기엔 곤란한게, 외젠은 장인 막시밀리안 국왕이 처음 항복 제의를 할 때도 이를 거절하고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버텼다가 항복한 것이다. 외젠으로선 양아버지와 장인 모두에게 의리를 지킨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