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금동대향로 (문단 편집) === 발견 === [[파일:external/dimg.donga.com/76490275.1.jpg]] 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때 물웅덩이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 관련 기사 모음 - [[http://www.ziksir.com/ziksir/view/1295|#직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310131538011&code=900102|#경향신문(상)]][[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310201543501&code=900102|#경향신문(하)]][[https://shindonga.donga.com/Series/3/990549/13/928059/1|#신동아]] 천수백여 년간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서는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발굴 결과 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는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다.[* 대향로가 중국제가 아닌 백제 자체 제작품이라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바로 이 대장간에서 만들었다는 것. 중국 학자들 중에는 박산향로 양식이 아예 없던 백제에서 느닷없이 대향로를 제작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대향로가 중국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남조 국가들의 무덤 벽화에서 대향로와 상당히 유사한 그림이 발견되기도 했음을 대향로가 중국제라는 주장의 근거로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향로가 하필 능산리 절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사찰 내에서 자체제작한 물품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물리적 근거는 당연히 정황 근거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중국 측의 억지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사실 대향로를 제작할 즈음이면 중국에서 박산향로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이다. 중국에서 백제의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수백 년 전 중국의 전통을 되살려, 심지어 중국 본토에 있던 향로를 능가하는 명품을 만들어 백제에 선물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백제)|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 차원에서 세운 원찰인 듯하다.[* 위덕왕은 왕자 시절 대신들의 반대에도 신라 공격을 감행했고 성왕은 그런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4년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은 아들(미래의 위덕왕)과 백제군을 위문하고자 현장을 방문하다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위덕왕은 죄책감에 시달려 즉위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는 등 정신적으로 크게 방황했다. 대향로는 그런 위덕왕이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 성왕을 기리며 만든 사찰에서 출토된 향로라는 것. 최상의 예술성과 미적감각뿐만 아니라 6세기 백제 성왕과 위덕왕 부자의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최고의 문화재.] 처음 발견되고 11일이 지난 1993년 12월 23일, 여러 주요 일간지에서 일제히 국보급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대서특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