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범현대가 (문단 편집) === 현대가와 정치 === 여타 재벌이 그렇듯 범현대가 역시 정치권과 연관이 매우 깊었지만, 라이벌인 삼성과 달리 이 쪽은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활동했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현대건설]]의 리즈 시절이었던 1960년대~1980년대에는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와 연줄이 깊었고 본격적으로 [[현대아산]]을 세우고 대북 사업에 뛰어들었던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와 사업적 관계를 형성했다. 범현대가 중 처음으로 정치에 직접 뛰어든 인물은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다.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뒤 돌연 정치에 관심이 생기자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했다. 앞서 열린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총 31명의 당선자를 내며 원내 제3당이 되었고,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여러 인사들을 영입하고 당원만 1000만명 가까이 모집하기도 했다.[* [[최불암]], [[강부자]] 등 연예계 인사들 역시 정주영에게 공천되어 당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제3지대 역할을 공고히 하며 [[양김]]을 상대로 팽팽한 선거전을 펼쳤지만, [[초원복국 사건]] 등 여러 악재가 겹쳐 결국 본선에서 3위로 낙선하고 만다. 대선패배 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명인데 득표수가 438만표이라니... 당원들은 어디에다 투표한 것인가"''' 라며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주영은 대선 낙선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통일국민당에 손을 땠으며, 얼마 뒤 해산되었다. 두 번째로 대권에 도전한 인물은 바로 [[정몽준]]이었다. 1988년 울산 동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민주자유당]]과 [[통일국민당]]을 거쳐 무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해왔다. 울산에서 현대그룹의 입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동구에서만 5선을 했으며, 18대와 19대 총선에서는 서울 동작 을로 지역구를 옮겨 또 2선 국회의원을 했다. 무난하게 의정활동을 해오던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2002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데 그가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이라는 희대의 성적을 내자, 이와 더불어 정몽준의 지지율 또한 올라가게 된다.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순식간에 대선판의 캐스팅보트로 부상하는데,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노무현]]과 단일화를 하였으나 대선 투표 전날 지지를 철회하는 희대의 실수를 저지르며 결국 기회를 살리지 못하게 된다. 만약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 등 요직을 하며 대권주자로서 체급을 키웠다면, 다음 대선에서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만 했다. 정몽준 입장에서는 최악의 악수를 두었던 셈. 여담으로 현대그룹의 자본력으로 선거를 총지휘했던 1992년과 달리, 2002년의 현대그룹은 이미 [[왕자의 난]] 이후 계열분리가 된 상태였고, 현대그룹의 수장이었던 [[정몽헌]] 역시 대북송금 사건으로 수사망에 오르는 등 그룹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차원에서의 지원은 없었다. 정몽준은 이 후 국회의원직을 맡으며 정치활동을 이어가다가, 2014년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뒤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결론적으로 현대그룹에서 직접 정치에 도전한 정주영-정몽준 부자 모두 국회의원과 총재(당 대표)를 지내는 등 요직을 두루 맡았지만, 끝내 대통령에는 당선되지 못하고 정치활동을 접었다. 정몽준이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아직 범현대가에서 정계로 진출한 사람은 없다.[* 범현대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은 대통령 단선에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