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폐개혁 (문단 편집) === 단독 개혁 결정 === 영국은 국민정부가 영국 파운드와 신 화폐를 연계할 의사가 있다고 타진하자 즉각 호응해 단독으로 전문가 파견을 결정하고 1935년 6월 정부 수석 경제고문인 프레더릭 윌리엄 리스로스(Frederick William Leith Ross, 1887 ~ 1968)를 대표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견하였다. 9월 21일 중국에 도착한 리스로스는 중국 폐제계혁과 차관제공 계획을 정리하여 중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하고 영국 파운드에 연계한 관리통화제를 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개혁안을 작성했다. 리스로스의 개혁안은 스털링과 중국의 신 통화를 연계하고 중국의 지폐발행권을 중국 중앙은행에 집중시킨다는 점은 국민정부의 생각과 같았으나 영일 협조를 위해 일본과의 연계를 강조하였고 또한 편의를 위해 만주국 정부에 1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한 후 국민정부가 만주국을 인정하는 대가로 그 1천만 파운드를 제공받는다는 방식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쿵샹시와 쑹쯔원은 물론 [[왕징웨이]]를 비롯한 대일 유화론자들까지 극렬 반대하였다. 여기에 영국 [[외무부]]도 반대했다. 주중 영국대사 캐도건은 "영토를 금전거래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가장 혐오하는 것일 뿐 아니라 영국이 여기에 가담하는 것은 종래의 외교방침에 위배되고, 또 일본은 만주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영국을 앞잡이와 같이 취급하게 될 것이다."라며 반대했다. 또 1935년 9월 6일 리스로스가 일본의 양해를 얻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본외상 [[히로타 고키]]와 외무차관 [[시게미츠 마모루]] 등은 모두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이는 일본이 선제적으로 치외법권, 조계지 철폐, 열강군대 철수를 주장함으로 중국에서 영미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중일 제휴를 통해 [[소련]]에 공동으로 대항한다는 시게미츠의 노선에 따른 결과였는데 반영적인 시게미츠 구상의 결과, 영국이 만주국을 승인할 수 있다고 제시한 유화책을 단순히 영국이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 정도로 알고 묵살한 것이다. 이에 리스로스는 9월 22일 난징에서 쑹쯔원, 쿵샹시와 회담하고 만주국 방안을 단념하였다. 리스로스는 만주국 방법의 대안으로 영국이 1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하여 폐재개혁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정부에게 영국에 차관을 요청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단독 차관 제공이 일본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하여 차관 제공을 연기했다. 여유가 없던 국민정부는 차관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은의 국유화와 페제개혁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