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흥왕 (문단 편집) === 즉위 전 === 법흥왕은 이미 아버지 [[지증왕]] 시절부터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이 40세 전후하여 승하한 것에 비해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의 즉위시 나이가 64세로 고령이었다는 점에다 인척 관계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지증왕에 있어서는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경주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이를 임신하게 된 시점이 어림잡아도 500년 9월의 일인데, 두 달 뒤 곧바로 승하한다. 왕위 계승 과정이 석연치 않은 게 확실한 셈.] 그러나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혼인 시기가 [[50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60세에 접어들 때에 낳은 아들이 되는데, 법흥왕은 즉위 시 16세를 넘을 수 없는 나이여야 한다. 지증왕이 그 이전에 혼인을 안 했을 리가 없고 그 전에 자식이 없을 리도 없다.[* 이 때문에 연제부인이 법흥왕의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101720&code=kc_age_10|#]]] 그럼에도 법흥왕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체로 법흥왕의 위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향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실제 혼인 시기는 기록과 달리 500년 이전이었는데, 지증왕의 즉위 과정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지증왕 즉위 이후의 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487년 박씨 가문과 연계되는 신궁을 설치했던 일에 지증왕이 어느 정도 관여했었다면, 이 즈음에 지증왕과 연제부인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즉위 시 나이도 10대 후반이 아닌 20대~30대 사이가 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한 나이가 된다.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은 성씨가 박씨다. [[눌지 마립간]]의 자손들은 대체적으로 눌지 형제의 자손들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역시 눌지 형제의 자손에 속하는 지증왕의 부인이 박씨라는 점은 당시 여러 체계에서 꽤나 벗어난 경우가 된다. 하지만 지증왕이 [[김미사흔]]계에 밀리고 있었던 [[김복호|복호]]계의 위치에서 생각해 볼 때, 다른 왕비족을 맞아들여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이 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신라 왕비로는 꽤나 특이하게 전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의 부인이 모두 박씨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복호계와 박씨의 [[연합]]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법흥왕은 아버지의 나이가 7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외가인 박씨 집안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김입종]]과 함께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에 김입종은 법흥왕 대에 신라 6부 중 한 부의 수장으로 올라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