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흥왕 (문단 편집) === 불교 공인 ===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거나 널리 퍼지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 수용을 선포한 것으로, 흰 [[피]]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에는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고유 토착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중국과 가까워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외래 종교를 들여와 토속 종교를 억누르는 것으로 제사장을 겸하고 있던 귀족 [[계층]]의 권위를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 같은 과정을 거친 국가로 [[일본]]이 있는데, 모노노베씨와 소가씨의 항쟁으로 2탄을 찍는다.] 법흥왕은 신라의 토착 종교와 관련된 7개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절(불교)|절]]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 유명한 것이 [[흥륜사]], [[분황사]],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 [[불국사]]이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 현재까지도 [[경상도]]가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신라)|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 빽빽하다. 법흥왕 재위 당대인 535년에 남겨진 [[울주 천전리 서석]] 을묘명[* 을묘년에 새겨져서 을묘명이라 한다.]은 안급이(安及以)라는 이름의 승려와 그의 일행이 왔다갔다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하여 불교를 중흥시킨 성스러운 [[대왕]]으로 높여주고 있다. 불교를 밀어준 왕이다보니 불교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