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흥왕 (문단 편집) ===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 한편 법흥왕이 신라를 다스리던 6세기 초반 당시의 [[금관국]][* [[금관가야]]를 뜻한다. xx가야라는 표현은 한참 후대인 [[고려]] [[태조(고려)|태조]] 때부터나 사용된 것이다.]은 100여 년 전의 [[신라-왜 전쟁]] 이후 [[전성기]]를 벗어나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잃은 채 약화된 상태였고, 한때 [[고구려]]의 속국 신세였던 신라와의 국력 차이는 이미 [[넘사벽]]으로 벌어져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법흥왕은 장차 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금관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529년에는[* 한국 사서에는 안 나오고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조〉에만 나오는 사건이다. 이하의 내용은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과 윤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핵심만 요약한 것이다.] [[구형왕]]이 신라로부터 위협을 느껴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왜국이 가야권과 유착되어 있었고 때때로 왜군이 남부 지방에 파견된 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나오는 이야기니 일본 측의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신라는 상신(上臣) [[이사부]]에게 3,000명의 병력으로 [[토벌]]을 명한다. 왜국 측 [[오우미노케나|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이사부의 군대를 보고 도망가자 이사부는 금관국을 포함한 4개 [[도시]]를 빼앗고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쇠퇴한 상태였던 금관국은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532년, 금관국의 [[구형왕]]이 [[왕비]]와 큰 아들 [[김세종]], 둘째 아들 [[김무덕]], 막내 아들 [[김무력]]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 이때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한 군사적 충돌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것처럼 나오는 데 반해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음에도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며,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여튼 [[구형왕]]이 항복해오자 법흥왕은 [[금관국]]을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해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금관국을 흡수하면서 얻은 법흥왕의 또 다른 이득은 [[인재]]인데, 구형왕의 장남인 김세종과 막내 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김무력의 첫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이고 둘째 손자인 [[김흠순]]도 뛰어난 장군으로 활약했다.《일본서기》에서는 금관국뿐만 아니라 [[탁순국]][* 오늘날의 [[창원시]]로 비정된다.]과 [[탁기탄]]의 항복까지 법흥왕 때 받아낸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라와 인접한 가야권 동쪽 몇몇 나라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대체로 친(親) [[백제]] 성향으로 기울었고, 가야의 완전한 병합은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꺾은 후인 [[진흥왕]] 시대에 완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