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벙부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탕화묘 중국 벙부.jpg]] 룽시호 동안에 남아있는 명나라 개국공신 [[탕화]]의 묘 (汤和墓). 고대사는 이웃한 펑양과 상당히 겹친다. 한대에 구강군 음릉현과 패군 용강현이 설치되었고, [[원술]]이 황제를 칭한 후에는 서쪽 화이위안에 의성현이 설치되었다. 당송 시기에는 종리군 혹은 호주 도산현에 속했다가 원대에는 방부지 (蚌埠集)로 불렸다. 명대 봉양부를 거쳐 청대에는 화이허를 경계로 북쪽의 소방부와 남쪽의 대방부 (노방부)로 구분되었다. 1863년 첫 관청이 설치되었고, 1909년 진푸 철도를 위한 벙부 화이허 철교 공사가 시작되었다. 1911년 교량과 역사가 완공되며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된 벙부는 점차 도시화되었고, 군사적으로 중요해져 1914년 [[직봉전쟁]] 당시 전투가 벌어졌다. 1929년에는 펑양현과 분리된 자체적인 도시가 세워질 뻔했으나 이듬해 무산되었다. [[중일전쟁]] 기에는 쉬저우 공격에 나선 일본군에게 1938년 2월 21일 점령되었다. 일본의 [[괴뢰국]]인 [[왕징웨이 정권]] 하에서 벙부는 안후이성의 성도로 지정되었고, 일본측 후방 보급 도시로 발전하였다. 전후에는 화이위안시와 펑양시가 설치되며 벙부란 이름이 가려졌으나, 1947년 새해에 벙부시가 설립되었다. 이어진 [[국공내전]]의 화이하이 전역에서 벙부는 그 남쪽 끝에 해당되었고, 1948년 말엽 전세가 위급해진 국민당 군은 쉬저우의 병력을 차출해 벙부에 배치, [[화이허]]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럼에도 1949년 1월 20일 [[인민해방군]]이 벙부를 점령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공업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중공업에 중점을 둔 [[대약진운동]] 당시 주목받았으나,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다른 도시들에도 철도가 놓이며 안후이성의 교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기에 점차 쇠퇴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 도시이며, 21세기 들어 재차 개발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