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수엘라 (문단 편집) === 양당제와 신자유주의, 석유 국유화 === 하지만 다시 1958년 반공주의 군부가 시민혁명으로 붕괴하고 중도좌파 성향의 여당인 AD와 중도보수야당 기독사회당(COPEI), 우파인 민주공화연합(URD)이 '''「푼토 피호 협정(Pacto de Punto Fijo)」'''을 체결하면서 AD가 우위이면서 COPEI가 견제하는 양당제 풍토가 완성되었다. 베네수엘라판 [[55년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조약으로 군부, 재계, 농민, 노조 등 각종 단체들의 권리가 보호되었고 이후 토지개혁이나 민주개혁, 또 석유의 국유화(1976년)가 이뤄지면서 베네수엘라 정치를 군부의 위협없이 안정시켰다.이 시기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시작된 시기로, 카리브 연안 국가들 중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민주주의가 돌아가던 시기였다.[* 베네수엘라의 기초적 민주적 정치제도기반과 충분히 좌파에 우호적이었던 사회 토양은 이런 앞선 정치적 안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차베스 정책에 막강한 재원이 된 석유의 국유화,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킨 차베스의 사면을 이행한 것은 이전 정부들의 업적이었다. 물론 석유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커서 다른 산업이 별로 발전을 못했다는 문제점(이른바 [[네덜란드병]])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상당히 심했던 건 사실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가 도입된 80년대 이후 극심해져서 차베스가 당선되기 직전에는 빈곤층이 70%에 달하게 되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AD는 바탕코트 독트린 (Batancourt Doctrine)을 폐기하고 [[쿠바]]나 다른 국가와 관계개선을 꾀했으며,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도 소련과는 수교했으나 1960년대 좌파 게릴라전의 영향 때문에 쿠바와의 관계는 영 좋지 않은 편이었다(쿠바와의 관계가 좋아진 것은 우고 차베스 집권기에 들어와서부터다). 1976년 석유 국유화를 단행한 이후 베네수엘라 경제는 1인당 GDP가 남미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이 시절 카라카스에서 파리까지 직항으로 그 비싼 [[콩코드]]가 운행되고 1인당 위스키 소비량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오랜 양당 체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는데, 안정성 위주로 간 결과 다른 나라의 양당제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세대교체가 어려운 데다 양 당의 정책적 선명성이 약해지면서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어느 당을 뽑아도 별로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주게 되면서 점점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호황기는 몇년 후 [[오일쇼크]]의 [[부메랑]]인 석유값 폭락과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외채가 급증하면서[* 멕시코나 브라질도 이때의 금리인상으로 피를 봤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끝났다. 이후 사상 최대의 외채규모(350억불) 속에 국유화를 진행했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대통령(임기 1973~1978, 1988~1993)이 10년만에 다시 집권했다.[* 사실 이 당시 베네수엘라는 대통령의 재선이 허용되기는 하지만 연임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재출마를 하려면 다음 대통령 임기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황금기를 이끌던 그의 2번째 임기는 막장으로 점철된다. 국유화된 기업을 제대로 된 준비없이 민영화해버리면서 민생 파탄을 불러왔고 물가는 89년부터 91년까지 150%나 상승했으며 신자유주의 긴축정책에 따라 발생된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위가 빈번해졌다. 시위가 빈발해지자 페레스 정권은 1989년 '카라카소(caracazo)'라 불린 카라카스 시민들의 시위를 전차까지 동원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 추산 287명의 사망자[* 외부 관측자들은 2,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가 발생했고, 국민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베네수엘라의 푼토피호 체제에 커다란 파열음을 내게 된다. 결국 페레스 정권은 [[우고 차베스]] [[중령]]의 [[쿠데타]]를 겪었다. 쿠데타 세력은 항복했으나 정부는 부정부패 혐의와 대법원의 판결, 의회의 [[탄핵]]으로 페레즈 대통령은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다. 이후 COPEI 출신의 중도[* 라파엘 칼데라는 보수정치인이었지만 93년 대선 출마 당시에 反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워 여러 좌파정당의 지지를 받았다.]연정[* 하지만 경제위기+사회주의 운동당의 좌파세력의 연정 탈퇴로 의회에서 COPEI당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선될 때도 득표율이 30.4%.]을 라파엘 칼데라(Rafael Caldera) [[대통령]]이 이끌었다. 칼데라 정권은 초기에 보호주의 정책을 시행했으나 결국 94년 금융위기로 [[IMF]]의 보조를 받으며 변동환율제와 석유 [[민영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