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역사 (문단 편집) == 분단기 ==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 또한 [[드레스덴]]이나 [[쾰른]]과 같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처럼 연합군의 공습을 받으며 전쟁 내내 파괴되었으며 특히 유럽전선 최후의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1945년 4월 16일 ~ 5월 8일)에서 소련군과의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베를린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당시 베를린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한 소련군보다는 미 공군의 공습이 훨씬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의 인명손실이 5만여 명이 나온 데 비해 [[베를린 공방전]]에서는 인명손실이 그 2배인 10만 명이었다.] 베를린 공방전이 끝난 직후 베를린 인구의 무려 70%가 여성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이들이 거리의 잔해들을 치웠다. 잔해가 어찌나 많았는지 '''폐허와 잡석들을 모아올린 더미가 베를린에서 2번째로 높은 산[* 해발 120m인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 서베를린에 있었으며 미군의 감청 기지가 있었다.]이 됐다.''' [[파일:Berlin_1949-1990.png]] || || '''서베를린''' || '''동베를린''' || || 시기(市旗) || [[파일:베를린 주기.svg|width=100]] || [[파일:동베를린 시기.svg|width=120]] || || 면적 || 479.9㎢ || 409㎢ || || 인구(1946) || 1,996,250명 || 1,174,582명 || || 인구(1989) || 2,130,525명 || 1,279,212명 || || 점령국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미국]][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영국]][br][[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프랑스]] ||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소련]] || || 구(區)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노이쾰른(Neukölln)[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쇠네베르크(Schöneberg)[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슈테글리츠(Steglitz)[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템펠호프(Tempelhof)[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첼렌도르프(Zehlendorf)[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티어가르텐(Tiergarten)[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빌머스도르프(Wilmersdorf)[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슈판다우(Spandau)[br][[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라이니켄도르프(Reinickendorf)[br][[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베딩(Wedding) ||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베를린미테|미테]]'''(Mitte)[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 1986년 승격][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호헨쇤하우젠(Hohenschönhausen)[* 1985년 승격][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쾨페니크(Köpenick)[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마르찬(Marzahn)[* 1979년 승격][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팡코(Pankow)[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트렙토(Treptow)[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23]] 바이센제(Weißensee) || 이후 소련군의 점령 양상과 별도로 베를린 자체가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연합국 4개국, 즉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 냉전기 동서 베를린은 각기 미국과 소련의 원조로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단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옛 베를린의 모습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49년 독일 정부 두 개가 병립하자 소련 점령지구인 동쪽 지구(동베를린)는 ''사실상'' [[동독]]에, 나머지 3개국 점령지구(서베를린)는 ''사실상'' [[서독]]에 속하게 되었다. ''사실상''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연합군 군정기]]를 벗어나 동서독 양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베를린은 연합군 점령지대로 취급되어, 공식적으로는 서독의 영토도 동독의 영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 재통일]] 조약체결 당시 미영불소 4개국 정상의 서명이 들어간 것도, 베를린의 주권을 미영불소 4개국에서 [[독일연방공화국|통일 독일]]로 이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서베를린의 행정권을 서독이, 동베를린의 행정권을 동독이 행사했을 뿐이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도(Hauptstadt der DDR)'라고 칭했지만, 서방 연합국들은 공식적으로는 동독의 사칭 취급했다. '''소련을 포함한''' 제2세계 국가들은 그냥 동독 영토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서베를린에서는 [[독일 연방의회|서독 연방의회]] 의원을 선출하지만 직접 뽑는 게 아니라 서베를린 시의회의 간선으로 선출될뿐더러, 이들은 표결권이 없었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서독 기본법]]이나 [[연방헌법재판소|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서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징병제]]였던 서독 본토와 달리 서베를린에서는 징병제가 적용되지 않아 병역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심지어 동독 집권당이던 [[사회주의통일당]]의 [[https://en.wikipedia.org/wiki/Socialist_Unity_Party_of_West_Berlin|서베를린 지부]]가 존재했다. 이 상황은 1990년에 연합군이 철수하고 통일과 함께 정식으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이 합쳐져 베를린 주가 세워지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이렇게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은 공식적으로는 서독과 동독에 속하지 않았지만, 동베를린이 공식적으로 동독의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수도라는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상당수의 경기가 공식적으로 서독의 영토가 아닌 서베를린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편 서독에 속한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월경지|육지의 섬]]'이 되었다. 1948년 독일의 전후 처리 등을 두고 소련과 서방 국가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소련은 서베를린까지 완전히 먹어버릴 요량으로 서베를린을 전차 부대로 완전히 둘러싼 채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베를린 공수작전으로 인해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실패하고 말았고 서베를린은 계속 서방 자유주의 세계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한편 당시 서독과 비교 대상이었던 동독을 육성하기 위해 소련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동베를린은 동구권 국가 도시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그러나 냉전의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서방과 동구권의 경제적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동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자가 늘어났다. 매년 수십만명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하자 이러다가는 50년 이내에 동독 인구가 0명이 될 판이었다. 이것은 동독과 소련의 큰 골치거리였다. 사실 동독의 수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1950년대부터 베를린 장벽을 세우자고 줄기차게 스탈린과 흐루쇼프를 졸랐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확립한 [[포츠담 회담|포츠담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쟁의 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흐루쇼프는 울브리히트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베를린 탈주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동독 체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문제로 늘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후르쇼프는 1958년 베를린에서 연합국 4개국이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고, 그렇지 않으면 모종의 조치(전쟁)를 취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했으나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포츠담 협정 위반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물러나며 망신을 샀다. 그러나 1961년 미국 대선에서 약관 43세의 케네디가 아이젠하워의 부통령이었던 닉슨을 꺾고 최연소 미 대통령에 당선되자, 흐루쇼프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 케네디는 취임 직후 쿠바 [[피그만 침공]]에 실패하는 등 초기에 엄청나게 어리숙하고 삽질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얕보게 되었다.] 결국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흐루쇼프의 예상대로 케네디는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전쟁을 하느니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서방 시민들과 언론들로부터 무능한 자유세계 지도자라는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케네디가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면 소련은 이후 더 큰 도발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고, 예견대로 이듬해 소련은 쿠바 사태를 일으켰다.] 그러자 이때야 소련의 본색을 깨달은 케네디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경대응으로 돌아섰고, 흐루쇼프는 철수하며 이후에는 더 이상의 도발을 자제하였다. 이후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동독은 장벽에 죽음의 구역 (Todesstreifen)를 설치하여 지뢰, 철조망, 감시탑, 군견 등을 설치하고 탈주자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사살하라는 명령(Schiessbefehl)을 내렸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자유과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되었다. 한때 세계 정복을 꿈꾸던 베를린이었던 만큼, 서베를린만으로도 서독 제1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였다. 그러나 분단기는 베를린을 크게 쇠퇴시켰다. [[동독]] 한가운데 콕 박힌 서베를린에서 기업의 중추 업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연히 베를린에 있던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뮌헨]]으로 떠나갔다. [[축구]]라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전쟁 전까지만 해도 꽤나 강팀으로 먹어주던 [[헤르타 BSC]] 역시 분단으로 인한 접근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비실거리는 약팀으로 몰락하고, 대신 남부의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강팀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뮌헨으로 이사간 알리안츠는 [[바이에른 뮌헨]]에 [[알리안츠 아레나]]라는 선물을 안겨주게 된다. 아무튼 간에 이런 식으로 냉전 시기 서베를린에는 제대로 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동베를린은 공산주의 정권의 수도가 되어 온갖 삽질과 실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베를린 대학교 또한 동베를린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와 서베를린의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쪼개져버려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이전에는 주요 동독 탈출 루트이자 도심 교통의 중추였던 [[베를린 지하철]]과 [[베를린 S반]] 또한 장벽 건설과 함께 동과 서로 분리되어 무정차 통과하거나 유령역이 되는 역이 나오는 등 파행 운행되었다. S반은 동독 DR이 서베를린 구간까지 계속 운영하여 서독 측의 보이콧 대상이 되었고, U반은 서베를린측 노선망이 동베를린측 노선망보다 훨씬 충실했던 관계로 U반이 계속 교통의 중추로 기능했고, 함부르크처럼 노면전차를 버스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구 동베를린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U반 노선이 부실하던 관계로 미테 구 대부분의 역들이 유령역으로 전락했다. 이때의 흔적으로 지금도 베를린에서 노면전차는 구 동베를린 지역을 위주로 운행된다. || [youtube(QS1xvtLV8Xw)] || ||독일 분단 시절인 1980년대 [[영국군|영국 왕립 군사경찰]]에서 제작된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행하는 방법이 나온 안내 영상.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상으로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나와있다. 서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위해 동독 아우토반을 이용하는 동안 주차시설에 소련군, 동독군 또는 경찰이 있는 경우 해당 주차시설을 사용하지 말 것, 휴게소에서 정차하거나 사용하지 말 것을 안내하고 있다. 주요 사고시에도 동독 경찰에게 접근하지 말것과 중대한 경우가 아니면 소련 구급차나 동독 구급차를 이용하지 말라는 안내가 있다.||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 동독의 [[아우토반]]을 이용할 수 있었다. 동독 국적자가 아니라면 정해진 구간만 통행해야 했다. 따라서 해당 아우토반에는 동독과 서방의 자동차가 동시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서독에서 온 이용자들을 위한 휴게소가 따로 지정되어 있어서 서방인과 동독인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를 위해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막대한 사용료를 지불했다. 그런데 문제는 '''동독의 아우토반은 시속 80km의 속도제한'''이 있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 설계된 모델을 마이너 체인지해가며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생산하던 [[트라반트]]나 [[바르트부르크]] 등의 동독 승용차들에게는 시속 80km도 상당한 고속이었고, 상당수의 동독 자동차는 시속 80km로 달리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속도무제한 아우토반을 달리던 서독의 운전자들에게는 시속 80km 속도제한은 큰 문제가 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에 대해 동독 정부와 협상했고, 엄청난 추가 비용을 내고 서독 자동차에 한해 시속 100km 속도제한을 적용시켰다. 같은 도로를 놓고 서독 자동차와 동독 자동차에 다른 속도제한이 적용되는 상황은 동독 주민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느껴지기 충분했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같은 고성능 승용차가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독인들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고 한다. 철도로 서독과 서베를린을 이동하는 경우에는 동독 내 무정차하는 Transitzüge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동독 출경 시 동독측이 경비하기 쉬운 한적한 역에서 승객 전원이 심사를 받았다. 이후 1989년 동베를린 시민들 손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또한 분단된 지 45년 만에 재통합되었다. 이후 1991년에는 정부를 서독의 [[임시수도]] [[본(독일)|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 이후 지금까지 통일 독일의 수도로 기능한다. [youtube(zEkbYT5Bji0)] 나치 독일 시절과 현재의 베를린 비교.[* BGM은 나치독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운폴]]의 엔딩곡이다.] 1990년에는 독일 내에서 정부 기능을 베를린으로 환도할지 아니면 반세기 동안 실질적인 행정수도였던 본에 그대로 둘지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 보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데[* 현대문명진단 연재 당시 소스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되는 보수성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자이퉁]]에서 따왔다.] 천도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베를린 환도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인 "[[Bild|빌트]](Bild)'는 독일 국민의 52%가 베를린을 지지한다고 대문짝만하게 실었으며, 본 잔류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지 "엑스프레스(Express)"[* 이 신문은 [[쾰른]]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쾰른에서 가까운 도시인 본을 밀었다.]는 53%의 국민이 본 잔류를 지지한다고 역시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문제는 '''이 두 신문이 같은 날 발행'''되었다는 것(...) 아무리 4~5%가 오차범위 내라고는 하지만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두 신문이 [[아전인수]] 격으로 써제낀 결과였다. 결론적으로는 베를린으로 환도가 결정되어 오늘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