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팍스 로마나 (베리투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베이루트 로마 유적 1.jpg|width=100%]]}}}|| || {{{#000000 {{{-1 카르도 가도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 대로의 교차로.[br]인접한 계단은 로마 시대 기독교 박해로 사망한 '40인 순교자의 계단'으로 불렸다.}}}}}} || 로마 지배 하의 도시는 라오디케아 대신 페니키아 지명 비루타에서 유래된 '베리투스'로 명명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악티움 해전]]에서 활약한 제5 마케도니아와 제3 갈리아 군단의 퇴역병들을 도시에 정착시켰고, 기원전 14년 자신의 고명딸 율리아를 기념하는 '콜로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펠릭스 베리투스'라는 이름의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지정하였다. 인근에 티레, 시돈과 같은 대도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때 로마에 맞선 적이 있었기에 그러한 전력이 없던 베리투스가 선택되었다. 콜로니아 지정 후 로마 시민권자들의 대거 정착으로 도시는 빠르게 로마화 되었고, 베리투스는 페니키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라틴어가 주된 언어로 쓰이는 곳이었다. 한편, 도시가 헌정된 율리아의 남편이자 개국공신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아그리파]]는 베리투스를 각별히 여겼다, 그는 장엄한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지어 검투사 대결 등 각종 구경거리를 제공하였고, 그외에 목욕탕과 회랑 등 많은 공공 건물들의 건설을 후원하였다. 다만 그 규모에 비해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매우 적은 편이다. 인근 로마 제후인 [[헤롯 대왕]]도 도시에 포룸, 신전 등을 건설하였다. 로마 시대에 기존 헬레니즘 기의 도시는 항구의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 1세기 무렵 시가지 북부에 세워진 공동 바실리카는 다양한 색깔의 코린트식 기둥들이 늘어선 99m의 너비를 자랑하였다. 현재 총리궁이 위치한 사라이 (세레일) 언덕을 기준으로 그 동편에는 큰 규모의 목욕탕, 서북면에는 히드포룸 (키르쿠스)이 들어섰다. 4세기 로마 지리서에 의하면 베리투스는 안티오크, 티레 [[라타키아]], [[카이사레아]]와 함께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히드포룸을 지닌 도시였다. 베리투스의 히드포룸은 지중해권의 경제가 쇠퇴하는 5세기까지 기능하였다. 대규모 공공 목욕탕은 점차 증가하여 4개의 군집을 이루었고, 그와 함께 다수의 개인 욕탕들이 증가하자 로마인들은 베이루트 강 상류로의 수도교를 세워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켰다. 약 10km의 수도교를 통해 수송된 물은 현재 사라이(세레일) 언덕 기슭의 리아드 앗 솔흐 광장에 있던 거대한 집수장에 모인 후, 복잡하게 얽힌 납 혹은 점토관을 통해 다양한 목욕탕 저수조로 분배되었다. 목욕탕의 일부는 10세기까지 부분적으로 기능하였다. 베리투스는 로마의 동방 속주들 중 가장 로마화된 도시로 여겨졌다. 이곳은 페니키아 해안의 로마 식민도시 4곳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완전한 유스 이탈리쿰(제국 세금 면제)이 주어졌다. 도시는 로마 개선문과 함께 거대한 성벽으로 보호되었고 내륙과 해안을 따라 연결된 효과적인 로마 가도 덕에 레반트 일대의 비단 거래와 포도주 생산의 중심이었다. 겪자 무늬로 지어진 거리는 다마스쿠스나 라타키아와 같은 당대의 대도시들과 거의 같은 넓이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대에 이르러 베리투스는 [[바알벡]](헬리오폴리스)을 포함한 베카 협곡까지 관할하였다. 현재도 레바논 농경지의 절반 가까이가 위치한 베카 협곡은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령 시리아의 곡창지대였고, 여유분은 수도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 로마인들은 그 일대의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농촌 행정구인 파구스 아우구스투스를 세웠다. 트라야누스 시대 베리투스는 거대한 포룸과 네크로폴리스를 지닌, 인구 5만의 대도시였다. 번영을 상징하듯, 바다에 면한 빌라 (저택)들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고 현재 베이루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 황제들은 이렇게 완전히 로마화된 도시에 고급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베리투스는 라틴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 정착민 2세대인 네로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프로부스 (서기 25년경 출생)는 라틴 문법 및 문학과 철학의 대가로 제국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외에 문법학자 헤르미푸스 등 일부 그리스인들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인문학의 중심이던 베리투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후 3세기부터는 로마 법학의 중심으로 변모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3세기 말엽 설립된 베리투스 주교구는 안티오크 총대주교 하의 티레 대주교 산하에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주교는 후에 당시 제국의 수도이던 [[니코메디아]]의 주교를 역임한 에우세비우스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세례를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창이던 아리우스의 지지자였던 그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궁정에서 아리우스파를 지지하였고 339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2년 후 사망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베리투스 주민의 로마인 정체성은 5세기까지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