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십자군기 (바루트) ==== 1099년 5월 19일 [[1차 십자군]]이 도시 북쪽의 나흐르 알 칼브를 지나자 베이루트 태수는 그들에게 농지를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식량, 황금, 안내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반해 시돈의 영주는 십자군을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였고 이후 티레, 아크레 등지의 영주들은 베이루트의 관례를 따랐다. 1101년 9월 파티마 왕조의 팔레스타인 수복 시도로 벌어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베이루트 태수 사드 앗 다울라 알 카와시 역시 이집트군에 참가했다가 보두앵의 반격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10년이 지난 1110년 2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는 피사와 제노바 함대와 함께 베이루트를 포위하였다. 5천의 관민은 공격군의 공성탑을 수차례 파괴하며 결사적으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5월 13일[* 십자군 연대기 작가인 풀케르 드 샤르트르의 기록, 알베르 드 엑스는 5월 27일로 기록.] 도시가 함락되자 흥분한 십자군은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가차없는 학살을 자행하며 본보기를 보였다. 십자군의 중요 항구 중 하나가 된 도시는 프랑스어로 바루트(Baruth)라 불렸다. 베이루트 함락 후 보두앵 1세는 자신의 플랑드르인 친척 풀크 드 기네스를 그 영주로 봉하였는데, 1117년 그가 사망하자 도시는 다시 국왕령이 되었다. 그러던 1125년 고티에 1세를 시작으로 브리스바레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갈릴리 공국 산하에 속한 베이루트 영주는 그 아래에 다시 요충지인 토론과 바니아스[* 1129년 십자군령이 된 다마스쿠스 방면의 요충지. 1137년 장기 왕조에 빼앗겼으나 3년 후 재점령하였고 1157년이 누르 앗 딘이 도시를 일시 점령하나 곧 철수하였다. 결국 1164년 누르 앗 딘이 점령한 후 이슬람 측에 계속 남았다.] 영주를 봉신으로 두었다. 한편 아들이 없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는 장녀 멜리장드를 후계자로 정하였고, 1128년 베이루트 영주 고티에 1세를 프랑스에 보내 그녀의 남편감이자 자신의 후계자를 모색하게 하였다. 그렇게 다음 왕이 된 앙주 출신 [[풀크]]에 대해 현지 제후들은 반발하였고, 멜리장드의 동생 알릭스가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풀크는 북상하여 왕국의 최북단인 베이루트에 당도하였는데 곧 마주하게 될 트리폴리 백작 퐁스의 배신을 우려해 그곳에서 해로를 통해 안티오크로 향하였다. [[2차 십자군]] 당시 [[다마스쿠스]]를 포위한 현지 제후들은 곧 함락될 도시의 주인으로 베이루트 영주 기 1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와 독일, 프랑스의 군주들은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를 지지하며 맞섰다. 분열된 십자군은 결국 다마스쿠스 점령에 실패하였고, 연합군은 해체되었다. 상심한 기 1세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1163년 3월에는 점차 강해지는 [[동로마 제국]]과 [[장기 왕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던 보두앵 3세가 베이루트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브리스바르 가문은 베이루트 동남부의 타누크 계열 드루즈 세력인 바누 부흐투르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에 지친 고티에 3세가 1166년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에게 영지를 매각하며 베이루트는 41년만에 왕실 직할령이 되었다. 이듬해 동로마 황족이자 키프로스 총독이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훗날의 [[안드로니코스 1세]])가 해임된 후 망명해오자 아모리는 그에게 베이루트 영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이듬해 안드로니코스는 5촌 조카이자 보두앵 3세의 과부인 마리아 콤니니와 사랑에 빠졌고, 사촌인 황제 [[마누일 1세]]의 소환에도 불응하고서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