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이벨린 가문]]의 본진 ===== ||[[파일:베이루트 성채 2.webp|width=570]]||[[파일:베이루트 성채 1.webp|width=320]]|| ||||베이루트 이벨린 성채 유구. 기존 8세기 요새를 확장하였고 6m 너비의 해자로 보호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Castle_Square,_Beirut|상세한 설명]] |||| 이로써 1204년 십자군 영토는 1192년 살라딘의 제안대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발리앙의 아들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원수 직을 맡고 있던 장 드 이벨린은 이복누이 이사벨의 지지 하에 수복된 베이루트의 영주가 되었다. 장은 1209년 결혼을 통해 아르수프 영주가 되는 등 이벨린 가문의 세력을 불렸다. 1224년 장은 키프로스의 섭정인 동생 필리프를 방문했는데, 이벨린 가문과 나머지 파벌 간에 열린 토너먼트 행사에서 반칙 여부를 놓고 분쟁이 일어 뤼지냥 파벌의 아모리 발라리가 이벨린 가문의 상대를 덮쳐 불구로 만드는 일이 있었다. 그후 필리프가 복수를 천명하자 장은 조사를 명분으로 아모리 발라리와 함께 베이루트로 돌아갔다. 1227년 필리프가 사망하자 장은 키프로스의 섭정도 겸하였다. 이듬해 6차 십자군과 당도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장을 연회에서 체포, 키프로스의 세금과 베이루트 영지를 요구하였다. 장이 침착하게 변호하자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명목상의 복속을 서약시킨 후 석방하였다. 그후 일시적 무력 충돌 끝에 반이벨린 측의 아모리 발라리가 키프로스의 바일리(재상)가 되었다. 그후 장은 아크레 귀족회의에서 베이루트 영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였다. 베이루트 귀속 문제는 20여년 간의 제국파 (기벨린)-이벨린 분쟁(롬바르드 전쟁)의 시작이었다. 1229년 프리드리히가 귀로에 오르자마자 장은 키프로스의 아모리 발라리를 공격해 격파하였다. 1231년 가을 프리드리히는 새 십자군이라며 필랑기에리 휘하 2천여 병력을 파견하였다. 필랑기에리는 대세가 기운 키프로스 대신 베이루트를 공격하였다. 장이 병력 대부분과 출정했기에 시타델에만 소수의 수비대가 있었고, 그를 이끈 주교는 항복하였다. 1232년 봄,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와 트리폴리 부근에 상륙한 장은 베이루트를 기습하였고 80명의 기사들과 수비를 맡은 아모리 발라리는 도주하였다. 그후 필랑기에리의 동생 로타르가 재차 베이루트를 포위하였다. 그럼에도 장은 카이사레아의 조카 장 드 브리스바르와 함께 제국파의 거점 티레로 남하하였고, 결국 로타르가 그곳으로 소환되며 포위는 풀렸다. [[https://www.crusaderkingdoms.com/winter-war-for-beirut.html|참고 자료]] 그후 키프로스에서 제국군을 축출한 장은 1236년 초엽 사망하였다. 장남 발리앙이 베이루트, 차남 장은 아르수프를 계승하였다. 발리앙은 1243년 티레의 필랑기에리를 축출, 롬바르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였다. 1246년 예루살렘 섭정에 오른 앙리 1세는 발리앙에게 전권을 부여하였고, 그의 사촌 장을 공석이 된 야파-아슈켈론 백작에 봉하며 이벨린 가문은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왕국의 주요 도시들 중 베이루트, 아르수프, 야파, 아슈켈론이 이벨린 가문의 직할령이었고 카이사레아의 장 역시 친척으로써 그의 편이었다. 시돈의 그라니어, 티레의 몽포르 가문 정도만이 대적할만한 세력이었으나 그들 역시 이벨린 가문에 호의적이었다.] 그 중심인 베이루트는 아크레 다음으로 번영하였고, 이벨린 궁전이 세워졌다. 1247년 발리앙이 사망한 후 두 아들인 위그와 장 2세가 차례로 계승하였다. 한편 기사단이나 안티오크 공작과 달리 예루살렘 왕국은 남하하는 몽골군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발리앙은 템플러들과 몽골령 갈릴리를 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몽골군에게 파괴된 시돈, 티레와 달리 베이루트는 그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후 이벨린 가문은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맘루크 왕조의 승리에 일조하였고, 이에 술탄 [[쿠투즈]]가 가릴리 반환을 약속하였다. 다만 1261년 장 2세는 다마스쿠스에 있던 후임 술탄 [[바이바르스]]를 방문해 약속 이행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1264년 장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장녀 이사벨라가 계승하였다. 1265년 술탄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 아르수프를 함락하며 대십자군 공세에 나섰다. 이듬해 이사벨라 등 제후들은 휴전을 청하였으나 바이바르스는 이를 묵살하고 사파드를 함락하였다. 한편 이사벨라와 결혼한 키프로스 국왕 위그 2세가 1267년 맘루크 선박을 나포하자 바이바르스는 베이루트의 사절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사벨라는 승조원 석방 및 손해 보상을 약속, 이듬해 이행하며 위기를 넘겼다. 그후 자파, 안티오크 등이 함락되고 트리폴리가 지속적으로 습격당하는 중에도 이사벨라는 7차 십자군 소식에도 불구하고 바이바르스와 단독으로 강화를 맺었다. (1269년 5월) 한편 위그 2세가 사망한 후 한동안 독신이던 이사벨라는[* 정확히 말하면 독신은 아니고 37세 연상인 전 시돈 영주 줄리앙과 사귀었다..] 7차 십자군에 동행했던 영국인 기사 하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1년도 안되어 사망하였고, 바이바르스를 이사벨라와 베이루트의 후견인으로 지목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키프로스-예루살렘 국왕 위그 3세는 이사벨라를 납치해 휘하의 제후와 결혼시키려 하였고, 이에 바이바르스는 베이루트 공격을 시사하며 위협하였다. 도시의 참사회와 템플 기사단마저 술탄을 지지하자 위그는 그녀를 석방하였다. 그후 이사벨라의 신변 보호 명목으로 베이루트에는 일시적으로 맘루크 수비대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이를 기회로 도시를 점령하지는 않았고, 이사벨라에 대한 후견인 역할에 만족하였다. 1274년부터 이사벨라의 모친 알리스가 섭정을 맡으며 베이루트는 안정을 되찾았다. 1276년 이사벨라는 명목상의 카이사레아 영주 니콜라와 결혼했는데, 그 역시 이듬해 키프로스에서 살해되며 그녀는 3번째로 과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콜라를 죽인 이는 이사벨라의 오촌 당숙인 보두앵 드 이벨린이었다.] 1278년 이사벨라는 기욤 발라리와 결혼, 이번에는 4년간 유지되었으나 1282년 이사벨라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그녀의 동생 에쉬브와 음프헤 드 몽포르 부부가 계승하였다. 한편 위그 3세는 1277년부터 시칠리아 국왕 샤를 드 앙주의 수중에 있던 아크레 수복을 위해 1283년 여름 그곳으로 향하였다. 다만 강풍으로 8월 1일 대신 베이루트에 정박하였고, 곧 티레로 남하하였다. 11월 그 영주인 장 드 몽포르가 사망하자, 베이루트의 음프헤가 계승하였다. 위그는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할 시에 왕령지가 된다는 조건 하에 승인하였는데, 이는 3달 후 실현된다.[* 음프헤에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위그는 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장의 과부이자 자신의 누이인 마가렛을 영주로 봉하였다.] [[파일:베이루트 오마리 모스크.jpg|width=770]] 1150년 옛 로마 목욕탕 자리에 세워진 성 (세례자) 요한 성당. 1291년 맘루크 점령 후 알 오마리[* 칼리파 [[우마르]]를 기린다.] 사원으로 전환되었다. 그후 에쉬브 드 이벨린은 한동안 재혼하지 않고 베이루트를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티레의 영주 마가렛과 함께 대표적인 여성 제후였다. 1285년 봄, 맘루크 술탄 [[칼라운]]이 북상하자 그녀들은 휴전 의사를 표하는 저자세를 보였다. 이듬해 신임 국왕 앙리 2세는 부왕이 숙원이던 아크레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던 1291년 술탄 [[칼릴]]이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자 재차 전운이 드리웠다. 마가렛은 티레를 조카이자 앙리의 동생인 아모리에게 넘겼고, 에쉬브는 앙리의 다른 동생 기와 결혼하였다. 그해 4월 맘루크 대군이 아크레를 포위하자 베이루트의 수비대 역시 그 방어를 위해 차출되었다. 그러나 5월 18일 아크레는 함락되었고, 아모리는 키프로스로 도주하였다. 술탄 칼릴은 부관 슈자이에게 레바논 해안의 평정을 맡겼다. 한달에 걸친 포위 끝에 시돈을 점령한 슈자이는 7월 21일 베이루트를 포위, 도시 지도부를 소환하였다. 그들은 순응하여 성을 나섰으나 체포되었고, 이에 남은 수비대는 철수하였다(1291년 7월 31일). 도시를 접수한 슈자이는 이벨린 성채를 파괴하고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