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징시 (문단 편집) === [[화베이]]의 주요 도시 === [[파일:계성.jpg]] 계성은 서기 295년의 대홍수 후 기존의 전기 계성에서 후기 계성으로 이전되며 현재의 도심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통적으로 계라 불린 베이징은 허베이 지방 북부의 거점이었다. 고대 시기의 계성은 [[노구교]]와 완평성이 위치한, 현 베이징 도심의 서남쪽 외곽인 [[펑타이구]]와 [[시청구]]에 걸쳐 있었다. 8세기 이상 이어지던 연나라는 기원전 226년, 10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진(영성)|진나라]]에 계를 빼앗긴 후 곧 멸망했다. [[진시황]]의 [[군현제]]에 있어 베이징 일대는 광양군 (廣陽郡)에 편성되었고, 계성은 계현 (薊縣)으로 개칭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다만 20년도 안되어 [[진승·오광의 난]]과 함께 [[한광]]이 연왕으로 추대되며 연나라는 부활했고, 이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시에 (한광의 부장이던) [[장도(연왕)|장도]]가 연왕으로 책봉되며 공식화되었다. 이어진 [[초한쟁패기]] 당시 장도는 [[항우]]를 배반, [[유방]]의 천하 통일을 도왔기에 재건된 연나라는 [[한나라]]의 몇 안되는 이성 제후국인 연국 (燕國)으로 남을 수 있었다. 기원전 202년, 장도가 이번에는 유방을 배반하며 반기를 들자 유방은 친정하여 그를 주살하고 개국공신 중 하나인 [[노관]]을 연왕에 봉했다. 노관 역시 기원전 195년, [[여후]]를 두려워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자 유방의 아들 유건이 연왕에 봉해져 연국은 동성 제후국이 되었다. 기원전 180년 유건이 사망하자 여후는 친족인 여통을 연왕에 봉했으나, 곧 그녀가 사망하고 여씨 일족은 숙청되었다. 이후로 연국은 광양국 (廣陽國)으로 개칭되어 제후국이 아닌 [[유주]] 산하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계현은 광양국의 치소이자 유주 자사부가 위치한 북방의 중심 도시로 유지되었다. [[후한]] 건국 직후인 서기 26년, 건국 공신이던 [[팽총]]은 반란을 일으켜 긴 공방전 후 이듬해 계성 (계현)을 점령하고 연왕을 칭했다. [[광무제]]는 직접 토벌하지 않았으나, 29년 팽총은 내부 배신으로 제거되었다. 이후 군현제가 강화되며 광양군이 재차 설치되었고, 이는 3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다만 천 년간 국호이던 연 (燕)은 지역명으로 확연히 정착한 상태였고, 계현이 종종 '[[연경]] (燕京)'이라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외치는 말도 "나는 연인 (燕人) 장비다!"인데,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군 탁현[* 현 [[바오딩시]] [[줘저우시]]] 역시 광양군 계현과 함께 연나라의 옛 영토인 유주 관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비 역시 스스로 연나라의 후예인 '연인', 즉 연 지방 사람으로 지칭했던 것이다. [[18로 제후]] 중 처음으로 허베이 지방의 패권을 잡을뻔 한 [[공손찬]]도 근거지는 베이징 동쪽의 우북평[* 이 우북평군은 지금의 탕산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으로 근세 베이징의 별명인 북평과는 가깝긴 해도 별개의 지역이다.] (현 [[탕산시]])였지만 정식 칭호는 '계후'였다. 공손찬은 유주 자사 [[유우(삼국지)|유우]]와 계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자를 죽이고 유주를 장악했으나, [[기주]]의 [[원소]]에 패하여 [[역경루]] (현 베이징 남쪽 [[슝안신구]])에서 농성하다 죽었다. 원소는 아들 [[원희]]를 유주목에 봉했으나, 허베이를 평정한 [[조조]]가 북상해오자 관민들이 투항했다. (205년) [[조위]] 건국 후 225년 [[조비]]는 동생 [[조우]]를 연왕에 봉했고, [[조예]]의 치세인 232년 광양군은 재차 제후국인 연국으로 개편되었다. 조우는 조예 사후 섭정이 될 기회를 놓쳤고, 260년 아들 [[조환]]이 황제가 되었으나 266년 그가 폐위되며 조위는 멸망했다. 조우 역시 연왕에서 연공 (燕公)으로 격하되었고, 278년 사망한다. 조위를 멸하고 [[서진]]을 세운 [[사마염]]은 동생 [[사마기(서진)|사마기]]를 연왕에 봉했다.[* 그 무렵 홍수로 인해 계성과 시가지는 조금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297년 사마기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조카인 제왕 [[사마경]]의 아들 사마기가 연왕이 되었으나, [[팔왕의 난]] 중 사마경이 몰락한 후 연국은 폐지되었다. (302년) 그 무렵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외]]는 [[영가의 난]]을 틈타 유주를 장악했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337년 [[전연]]을 세웠다. 전연은 본래 [[요서]]의 용성을 수도로 삼았으나, 349년 2대 황제 [[모용준]]이 계성으로 천도하여 357년 다시 [[업]]으로 천도할 때까지 그 수도였다. 전연은 370년 [[전진]]에게 멸망했으나, [[비수대전]] 후 모용준의 동생 [[모용수]]가 후연을 세우며 재건되었다. 다만 후연은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북위]]에 대패하여 쇠퇴했고, 베이징 일대는 북위의 영토가 되었다. 점차 중요도가 오르던 베이징은 비록 [[북위]] ~ [[북주]] 시기에 소외를 겪긴 했으나, [[당나라]] 말엽 허베이 지역 절도사 정권들의 혼란기를 거쳐 등장한 북방 정복왕조들이 지속적으로 도읍으로 정하면서 위상이 올라갔다. 우선 [[요나라]]의 5경 중 남경이 되었고, 뒤이은 [[금나라]]와 [[원나라]]는 아예 수도로 삼았다. 중세 이후 허베이를 통치한 유일한 한족 왕조인 [[명나라]]도 처음에는 [[난징]]이 수도였지만, 황자 시절 베이징 (당시 북평)에 주둔하던 '연왕' [[영락제]]가 천도했고 [[만주족]]의 [[청나라]] 역시 입관 즉시 수도로 삼았다. 금나라의 중도, 원나라의 대도, 명·청 대의 북평 / 북경까지 명칭 변천이 다양했으나 '연'이란 옛 지명도 유지되었다.[* 중세 중국에서도 요동-요서-허베이 일대를 상징하는 한자는 연 (燕)으로 유지되었고, [[수양제]]의 장손 [[양담]]이 연왕에 봉해졌다. 뒤이은 [[당나라]] 대에도 [[수당교체기]]의 개국 공신 [[나예(당나라)|나예]]가 619년 이씨 성을 하사받고 연군왕에 봉해졌다. 다만 그는 627년 [[당태종]]에 맞서다 죽었고, 후자의 동생 이영기와 아우 이우가 차례로 연왕에 봉해졌다. 다만 수나라 때부터 군현제가 완전히 정착했기에 더이상 행정구역에 -국이 붙지 않았고, 허베이도 (河北道) 유주 (幽州) 계현으로 유지되었다. 한편 유주는 후일 연주 (燕州)로 개칭되는데, 당나라 대의 연주는 요서의 지명이었기에 헷갈리면 안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