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징시 (문단 편집) === 중국의 수도 === [[파일:북경성1.jpg|width=600]] '천년의 왕성'이라 불리는 베이징성의 모습. 점선이 바로 명-청대의 이른바 '모자성'이다. 정주 문화인 화베이와 유목 문화인 만주 사이에 입지한 덕에 베이징은 유목 제국의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거대 제국들의 수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나라의 도읍 중도를 시작으로 베이징은 일부 기간[* 금원 / 원명 교체기 및 국공 내전기]을 제외하고 거의 항상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다. 금나라 시기 중도는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몽골-금 전쟁]] 개전 후 3차 침입 당시 몽골군은 1213-14년에 걸쳐 중도를 포위했고, 강화 채결 후 [[금선종]]은 중도를 포기하며 남경인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뒤이은 4차 침입에서 중도의 군민들은 1214-15년에 걸쳐 인육을 먹을 정도 처절히 저항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지휘한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이후 도시는 약탈, 학살, 방화로 인해 크게 파괴되었다. 중도성의 흔적은 성벽의 일부와 [[노구교]] 정도만이 남아있다. 남천한 금나라와 [[서하]]를 끝내 멸망시키며 북중국을 통일한 [[오고타이 칸]]은 중도를 위대한 도읍이라는 뜻의 '칸발리크' 혹은 대도(大都)라 명명했다. 이후 [[남송]]까지 멸하며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왕자 시절 자신의 거점이던 대도를 [[원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이민족]] 왕조이지만 이로서 베이징은 처음으로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고 대륙의 최중심지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또한 세계 제국인 몽골 울루스의 중심지로써 대도는 크게 번영했고, 이때 미래의 [[자금성]]의 모태와 성벽의 구획 등 베이징의 도시 구조가 대략적으로 정해졌다. 또한 원나라의 지배 계급은 몽골족이었기에, 지금도 [[몽골어]]에서 유래한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옛 골목가인 후퉁이 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은 후계자인 [[칭김]]을 연왕으로 봉했으나 그는 1286년 요절했고, 칭김의 아들이 대신 황태자가 되어 [[원성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번영하던 대도는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으로 쇠퇴하던 끝에 1368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접근해오자 내몽골의 [[상도 유적|상도 개평부]]로 천도하며 수도 지위를 잃었다. 원대 자금성의 흔적은 [[베이하이공원]] 일대에 주로 남아있으며, [[티베트 불교]]식 백탑이 떡하니 서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는 [[몽골]]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 [[주원장]]의 노력이며, 또한 애초부터 유목하던 [[몽골인]]들이 상도와 대도를 번갈아가면서 지냈기 때문에 사실 [[원나라]] 시절의 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도라기보다는 전시용 세트장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애석하게 한국에서 출발하는 패키지 상품에선 잘 안 간다.] 그 입구에는 작은 성채인 단성도 있다. 후일 1406-20년에 걸쳐 세워진 [[자금성]] 역시 원대의 궁성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대도를 무혈 접수한 [[주원장]]은 '북방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담은 베이핑부라는 이름을 지었고, 여전히 초원 지역에 남아있던 [[북원]]의 견제를 위해 연왕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아들들 중 [[주체]]를 연왕으로 봉했다. [[정난의 변]]을 거쳐 남경의 [[건문제]] 정권을 찬탈한 주체 ([[영락제]])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베이핑을 베이징으로 고쳐 천도했다. (1421년) 따라서 명나라는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처음이자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가 되었고, 당시에 세워진 자금성은 청대의 증축을 거쳐 현재까지 중국의 대표 관광지로 남아있다. 중국의 또다른 상징인 [[만리장성]] 역시 영락제의 베이징 천도 후 수도의 방위를 위해 대대적으로 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으로, 특히 베이징의 바로 위인 팔달령 장성의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토목의 변]] 이후 [[만력제]] 연간까지, 만리장성 축조에 천문학적인 공을 들인 명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장성 내의 같은 한족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이자성의 난]]) 이후 명과 대립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 신사층의 지지를 받으며 입관했고, 동시에 [[순치제]]는 도읍을 성경 ([[선양시]])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후 성경은 봉천부로 남는다] 명의 제도를 답습한 청나라는 행정구역 역시 그대로 유지하여 명-청대 베이징은 4대 천부 중 하나인 순천부(顺天府)의 경사(京師)에 편성되었다. 다만 이미 수도였기에 상위 행정 구역인 [[허베이성]](직예성)의 성도는 베이징이 아닌 다밍부, 바오딩부, 톈진부 등지를 전전했다. 청나라 때 베이징의 인구는 70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중화민국]] [[북양정부]]도 여기에 자리잡았다. 1914년에 순천부는 경조지방(京兆地方)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 순천부가 관할하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하(寧河)의 4개 현을 즈리성으로 넘겼다.[* 마치 현대의 [[도쿄도]]와도 유사한 형태의 행정구역이 된 것인데, 설치된 시기는 경조지방이 더 이르다. 현대의 베이징시는 이때 경조지방이 관할하던 20개 현 중 10개 현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에 [[위안스카이]]가 이곳에서 대총통에 취임했으며 이어 [[안휘군벌]]의 수령 [[돤치루이]]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 [[안직전쟁]] 이후 [[차오쿤]], [[우페이푸]] 등 [[직예군벌]]이 집권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관내진출을 단행한 [[봉천군벌]] [[장쭤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자금성]]은 [[청나라]] [[청나라 소조정|황제의 거처]]로써 인정받았으나, 이러한 복잡한 과정 속에서 [[핍궁사건|쫓겨났다]].] 그런데 1926년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북양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북양정부는 베이징에서 철수했고 국민정부가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후 경조지이 폐지되고 중심시가지 지역을 제외한 산하 현들은 모두 [[허베이성]]으로 이관되었으며, 남은 시가지 지역은 북방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베이핑(北平)으로 다시 격하되었다.[* 명나라 초와 같이 남방 세력이 베이징을 제압했다.] 북양정부는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당한 후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정함에 따라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중국의 수도는 [[난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로도 북중국의 중심지로 남던 베이핑은 1931년 [[만주 사변]]과 1933년 [[열하사변]]으로 졸지에 최전방이 되었고, 국민혁명군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어떻게든 옛 수도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이미 3면으로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던 베이핑은 불과 한달 만인 8월 8일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다만 국민혁명군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기에 시가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베이핑은 다시 중화민국령이 되었지만, 이듬해 [[국공내전]]이 재개된 이후 1948년 가을부터 베이핑은 공산군 측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러한 평진 전역의 결과, 1949년 1월 21일 화북토비총사령관 [[푸쭤이]]가 투항하면서 베이핑은 인민해방군에 무혈점령되었다. 이로써 같은해 설립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베이징으로 이름이 돌아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던 [[천안문 광장]]이 이곳에 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 후 올림픽을 계기로 건설붐이 일어 도시가 대규모로 정비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