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벨라루스/역사 (문단 편집) === 르네상스 === 연대기가 지식층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던 키예프 루스 그리고 [[가톨릭]] [[수도자]]들의 영향으로 벨라루스에서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키예프 루스의 역사를 담은 연대기들이 서술되었다. "1446년까지 쓰인 백러시아(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연대기"는 9세기부터 1446년까지의 역사와 설화를 담은 책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 루스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책이었다. "비호비에츠 연대기(Kronika Bychowca)"는 최초로 '''벨라루스어'''로 서술된 연대기로 13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독일 기사단의 전쟁부터 16세기까지의 정치사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동안 잊힌 연대기였다가 비호비에츠 가문에서 필사본 하나가 발견되면서 이후 1846년 중세 [[벨라루스어]]판 그대로 재출간되었다. 또한 [[마그데부르크]] 자치 도시들이 생기면서 벨라루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조금씩 받게 되었다. 인구 대부분이 [[농노]]로 묶여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의 도시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폴로츠크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시스크 스카리나[* 출생 ??~ 사망[[1551년]].]는 최초로 벨라루스어로 된 책들을 성공적으로 출간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여행 경험을 듣기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던 스카리나는 1504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배우면서 직접 역사, 철학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곧 독서광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파도바]]로 유학하여 그곳에서 의사 박사 학위와 면허를 딴 후에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 정착하고 돈을 모아 프라하에 벨라루스어로 된 책들을 출간할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스카리나는 1517년 벨라루스어로 번역된 시편을 키릴 문자로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2년동안 벨라루스어 구약 성서 23권을 1만권 넘게 인쇄해냈다. [[파일:525th-birth-anniversary-of-Francysk-Skaryna.jpg]] 프란시스크 스카리나 탄생 525주년 기념우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법전을 편찬하는 영예로운 작업에 참여한 스카리나는 비잔틴-러시아 문화와 가톨릭-프랑스-이탈리아 문화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법전 편찬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스카리나는 1534년 [[모스크바 대공국]]을 여행하며 자신이 인쇄한 성경을 배포하고자 했으나, [[성경]]은 [[교회 슬라브어]]로 쓰여진 것만 인정할 수 있다는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스카리나가 가져온 중세 루테니아어 성경은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가운데 불태워졌다. 크게 실망한 스카리나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가 여생을 의사로 일하며 보냈다. 모스크바 대공국 성직자들은 이후에도 한동안 활판 인쇄술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최초의 러시아인 인쇄업자인 이반 표도로프와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쫒겨나 벨라루스로 와서 교육용 복음서와 시편을 출간했다 하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인쇄술 혐오는 먼 훗날 [[표트르 대제]] 시절 이후에나 조금 가라앉았다. [[파일:600px-Polish-Lithuanian_commonwealth_1619_map.png]]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 기관인 귀족 의회의 법률은 종교의 자유를 명시했고, 의회 내 무시 못할 영향력의 정교회나 신흥 개신교 귀족 세력 또한 존재했기 때문에 나머지 유럽이 종교 문재로 피비린내나게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벨라루스는 비교적 평화로울 수 있었다. 폴란드어가 주도적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식어는 1696년까지 루테니아어 즉 중세 벨라루스어였다. 그러나 종교를 포함한 국정 문제의 거의 대부분을 귀족들의 자유에 맡겨 놓은 폴란드-리투아니아식의 관용 정책은 반대로 대지주 귀족들 자신들이 원하면 다스리는 영지의 종교적 다양성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 또한 막을 수단이 없다는 양날의 칼이었다. 16세기 말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으로 합쳐짐으로써 벨라루스 전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역이 되었다. [[루블린 조약]]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 왕국 쪽으로 아예 떼주어 버린 키예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일대는 중세 정교회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의식이 어딜 안 가고 [[예수회]]를 중심으로 기존의 정교회 귀족들을 개종시키거나 아예 소외시키려는 가톨릭계 귀족들의 문화, 종교적 침입에 반발, [[흐멜니츠키 대봉기]]와 [[대홍수]]라는 엄청난 판을 벌리며 아예 연맹의 뿌리 자체를 흔들었고, 형식적으로 아직 리투아니아 대공국 관할이었던 벨라루스에서도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예수회 교육을 중심으로 폴란드어를 일상언어로 차용하고, 공격적인 바로크 가톨릭 신앙을 추구하면서 17세기 중반 부터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분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