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벨라루스/역사 (문단 편집) == 근대사 == 17~18세기 벨라루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제국|스웨덴 왕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 사이의 3파전이 격렬하게 벌어지면서 많은 [[벨라루스인]]이 죽거나 도망갔는데. 이 때문에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던 시점에서 그 넓은 땅에 인구가 겨우 300만 명에 불과했다. 1648~1661년 사이 벨라루스 일대의 인구는 절반으로 감소하였고, 특히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이 격렬했던 동부 지역에서는 인구가 20%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전쟁이나 기근으로 사망한 인구도 많았지만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탈출한 인구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웃 우크라이나 지역이 전쟁이 더 격렬하게 벌어지긴 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초르노젬|땅이 워낙에 비옥]]해서 사람이 죽거나 잡혀가도 다른 지역에서 곧 이주민들이 몰려오는데 반해서, 벨라루스는 [[코사크]] 공동체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올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의 결과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벨라루스를 완전히 병합한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민스크현, 빌노현, 폴로츠크현, 모길료프현, 그로드노현의 5개 현으로 나누었다. 중세 키예프 공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들은 벨라루스 지방을 외세인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서 재탈환해야 할 땅으로 인식하여 정교회 문화와 동슬라브 언어의 부흥을 부추겼으며,[* 사실 이때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벨라루스어]]를 단순히 [[러시아어]]의 방언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직접 관리들을 이주시켰다. > 기존의 벨라루스 사학계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벨라루스가 러시아에 합병된 것은 "벨라루스 민족의 독자성 상실에 대한 위협을 예방할 수있는 진보적 상황"으로 해석해 왔다. 왜냐하면 당시 벨라루스 사회는 두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인종적으로나 언어, 종교적으로 서로 뒤섞일 수 없는 완전히 별개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상층계급은 폴란드 문화에 특권을 부여했고, [[폴란드어]]를 사용했으며, 카톨릭 신봉자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농민이나 소시민 등 대중 일반은 [[벨라루스어]]를 사용했고, 글을 쓸 때만 폴란드어를 사용했으며, 그들의 신앙은 대부분 카톨릭과 정교의 합동을 주장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종교합동파(униат)]]’였다. 벨라루스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 대중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권력의 자유를 누리던 폴란드 귀족계급 슐랴흐타(шляхта)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그 두 계급 사이에 민족적 공동체 의식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벨라루스는 제정러시아의 일원이 되면서 오히려 정치적 상황은 안정되었고, 봉건적 위계질서도 끝이 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벨라루스 땅이 러시아와 연합한다는 이념은 벨라루스인들의 정치적 삶이나 지적 경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30128|KCI 등재논문 : 벨라루스 민족 정체성의 이상과 현실]] [[벨라루스인]] 인구 상당수가 믿고 있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역시 점진적으로 해체되었다. 하지만 종종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 농노들이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귀족들에 대항하여 폭동과 소요를 일으킬 때는 오히려 사회계급 안정을 위한답시고 폴란드인 지주들 편을 들어주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였다. 벨라루스를 병합시킨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 문화의 보호자를 자처한 덕분에, 벨라루스 지역에 살던 가톨릭 지주들은 흐멜니츠키 반란 때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지주들이 때죽음을 당한 것과는 반대로 재산과 권력을 보존시킬 수 있었다.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이 러시아 제국이나 [[프로이센 왕국]]의 탄압을 받으며 각각 가톨릭 신앙을 굳게 유지하거나 또는 신봉하게 된 것과는 반대로 벨라루스 민중 사이에서는 정부의 정책으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후 정교회로 개종한 것에 대해 별 인센티브가 없는 풍조로 인해 비종교적인 분위기가 굳어져 갔다. 1861년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러시아 제국 치하의 벨라루스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귀족 지주들로부터 농노 해방을 시키는 와중에 일부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주들에게는 보상을 최소한만 해주었으며, 벨라루스 농부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농촌 공동체 미르는 농노 해방 정책 시행 이후 각 가정의 인원수대로 땅을 분배했는데, 이를 계기로 벨라루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 입장에서는 노동 가능 인원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으면 인원수대로 더 많은 비율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주에서 인구가 간신히 두 배 증가할 동안 벨라루스에서는 인구가 다섯 배나 증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