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벽지 (문단 편집) == 역사 == 중세까지만 해도 건축물 내부의 벽에 그림을 그려넣는다던가 하는 정도의 꾸미기 행위는 있어왔지만, 이러한 기법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빡쎄서 상류층 중에서도 정말 최상위 상류층이 아니면 쓰기 힘든 소재였다. 이에 대안책으로 나온 것이 이미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붙이는 것. 이는 일일이 다시 그리는 벽화 기법에 비해 작업 시간이 빠르고, 교체도 용이하며, 무엇보다도 비용이 저렴하여 널리 사용되어 왔다. 단, 최초의 벽지는 종이가 아닌 비단이나 무명천 등의 '교역품'들로, 이때 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여전히 꿈꿀 수 없었다. 17세기부터 종이를 벽지의 재료로 사용하면서 단가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에 벽지가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돌입하면서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벽지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그런만큼 값이 더 싸져서 중산층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여기에 더해 수많은 화가들의 범람으로 그림을 구하기 쉬워지자 이에 아마추어 화가들을 고용하여 벽지에 기존의 단순한 문양 대신 그림을 삽입하는 시도가 있었고 이게 큰 성공을 거두자 벽지는 단순한 문양들의 패턴을 벗어나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결국 벽지가 널리 대중화되다 보니 나중에는 '''벽화를 사용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조차 벽지를 애용하게 되었다.''' 상기하였듯 교체가 용이해서 질리면 바로 다른 것으로 교체하면 새로운 느낌이기 때문. 이 때문에 '벽화를 사용하느냐 벽지를 사용하느냐'가 사람의 경제적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닌 '벽지를 얼마나 자주 교체하느냐'가 사람의 경제적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바뀌었다.(물론 여전히 벽화를 쓰는 곳은 그냥 [[넘사벽]]) 장식미술이 발달한 [[영국]]은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벽지 대중화에 성공하였고 따라서 벽지 사업에서는 잔뼈가 굵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봉쇄 정책, 그리고 훗날 [[헨리 8세]]의 [[가톨릭]]과의 단교 선언 등으로 유럽 본토와의 거래가 쪼들리게 되면서 점차 몰락해갔고 벽지 사업의 주도권은 [[프랑스]]에게 빼앗기게 된다. 동양권의 경우 [[불교]] 미술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여전히 벽화가 주된 장식 기법이었으나, 18세기경부터 서양 문물의 대량 유입으로 벽지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동양권에서는 오랫동안 벽화 문화가 유지되어 왔었고 벽지가 이미 충분히 대중화를 거친 상태에서 유입되었기에 벽지의 예술성을 높게 쳐주질 않지만, 본고장 유럽에서는 벽지도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으로 쳐주고 있다. 프랑스 알자스 주에 위치한 '벽지 [[박물관]](Musée du Papier Peint)'이 존재할 정도로 벽지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실크(PVC) 벽지는 19세기 유럽에서 개발 되었으나 현재 유럽에서는 사용 금지 품목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