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발 (문단 편집) === 만주족 입관후 변발 강요 === 이 변발이 가장 유행한 시기는 바로 청나라 시기이다. 사실 청나라의 만주족 뿐만 아니라, [[중국]]을 정복한 거란,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한족의 헤어스타일에 관심도 없었고, 강요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많은 유목민들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이렇게 동화된 유명한 민족중의 하나가 [[선비족]]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아예 자신들의 인구보다 수십배 많은 한족에게 이 변발을 강요했다. 변발만 강요한 것이 아니라, 옷도 [[한푸]] 대신 [[치파오]]를 입으라고 강요했다. 이런 정책을 치발역복(剃发易服)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전족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것만큼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다만 만주족 여성은 전족이 금지되어 있었다. 1644년, [[순치제]](당시 섭정이던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도르곤]]의 명)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십일|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가정삼도는 가정성에서 봉기가 연거푸 일어나 진압을 실시하고 본보기로 학살과 약탈이 벌어졌지만 이후로도 두번이나 연달아 봉기군 점령과 진압군 점령이 벌어지면서 세번 연속으로 가정성과 근방의 한족 거주민들의 씨가 말라버린 사건을 일컫는다. 서양에서는 이런 모습이 기묘해 보였는데 보통 '돼지꼬리(변발을 말한다.)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했다'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변발령 시행과 아울러 청나라는 한족의 복식을 종래의 [[한푸]]에서 자신들의 복식인 [[치파오]]로 바꾸는 역복(易服)도 강제했는데, 체발은 즉시 집행되었으나 역복은 옷감과 실의 수급 문제가 있으므로 1년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 이듬해에 본격 시행되었다. 다만 역복 정책은 변발 정책처럼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았는데, 머리카락이야 자르면 되지만 옷의 형태와 규격을 강제한다는 건 전근대사회, 그것도 중국처럼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사회에서 빈틈없이 시행하는 건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청이 멸망할 때까지 치파오보다는 한푸에 가까운 복장을 입고 다니는 지역도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내리면서 '''"[[끔살|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말 그대로 '천명'이었으며, 이에 불응하는 것은 천명에 거스르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청나라는 변발령을 결연한 의지로 밀어붙여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 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가차없이 처형했고, 변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진압하였다. 한편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마을을 방문할 때 체발 도구와 함께 먼저 거쳐 온 마을에서 체발에 저항하다 참수된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며, 고을 안에 변발을 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고을의 관원들도 한 묶음으로 처벌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체발을 했더라도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처벌되었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머리를 체발하고 뒷머리를 남겨 놓은 소위 음양두(陰陽頭)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것으로서, 원래 변발은 동전 크기만한 면적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체발하는 소위 금전서미(金錢鼠尾)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머리는 동전 크기만 남기고 모두 체발하며, 남겨 놓은 머리를 땋았을 때 그 굵기가 쥐꼬리와 같이 얇아서, 동전을 꿰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했다. 금전서미(金錢鼠尾)의 뜻 자체가 금전(金錢)이 동전을 뜻하고, 서미(鼠尾)는 쥐꼬리를 뜻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nchuhairstyle.jpg]] 이렇게 해야 한다. 서미라는 말 그대로 쥐꼬리와 닮았다. 최근까지도 쉽게 볼 수 있던 중국의 거리 이발사는 청나라 때 변발을 깎으려고 파견한 하급관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