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월룡 (문단 편집) === 북한 미술계 재건 활동과 추방 === ||[[파일:변월룡1.jpg|width=350]]|| ||휴전 직후 평양미술대학 교수진과의 기념 사진 [br] 가운데 줄 왼쪽 세 번째가 변월룡.|| 1953년 7월부터 1년간, 변월룡은 소련 문화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북한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북한 미술계를 '''기초부터 재건'''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레핀 아카데미로부터 물려져온 다양한 미술 수업을 도입하고, [[일본]] 미술계의 잔재를 하나하나씩 없앴다. 말그대로 북한 미술의 토대를 새로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인정받아, 변월룡은 한 때 [[북한]] 핵심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승희]] 등 다양한 북한 [[유명인]]의 인물화를 그렸었고, 또한 북한 각지를 다니면서 다양한 풍경화와 기록화를 그리기도 했었다. 심지어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포로 송환을 기록화로 남기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이른바 작가의 투영인 [[소나무]]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변월룡이 [[북한]]방문과 거주로 인하여 소수민족 [[고려인]]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정체성의 고뇌를 어느정도 해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변월룡이 소련에 완전히 충성하기 힘들어하며 정체성의 고뇌를 느꼈음을 알 수 있는건 변월룡의 이름이다. 펜 바를렌은 한국명인 변월룡을 그대로 러시아어로 읽은 것.] 그러나 머지않아, 변월룡은 북한으로부터 '''영구 추방'''된다. 이전부터 북한은 계속해서 [[귀화]]를 제의해왔는데, 북한 내의 친소련파 축출 과정에서 귀화 제의를 연거푸 거부한 변월룡은 친소련파로 분류되었던 것. 이러한 추방 이후 변월룡이 남긴 북한 미술계에의 족적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그나마 나누던 북한 제자, 교수들과의 서편교류도 얼마못가 금지되어 끝나버리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