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결론 === 결론적으로 동남아는 물론 인구와 국력도 압도적이던 중국조차 [[아편전쟁]] 등에서 추풍낙엽으로 털려나가던 당시 극동정세에서, [[프랑스]]라는 잘 나가기로 손에 꼽던 서구 열강이 보낸 원정함대를 전근대적 무기와 체제로 저지하여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음은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존재하는 서구를 우월하게, 아시아를 저열하게 보는 차별적 시선에 일침을 가했다는 역사적 의의와, 당시 조선이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는 국제정치적 의미가 있다. 다만 후자는 조선이 이런 외교적 이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의미가 퇴색됐다.] 그러나 조선은 명확한 기술격차에도 불구하고 [[공세종말점|지정학적 위치]]와 [[양헌수|현장 지휘관의 전술]]에 힘입어 [[신승]]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며 서양세력을 기존의 병기와 현재의 체제로도 막아낼 수 있다고 오판하였다.[* 물론 당시 조선 조정도 서양과 조선의 기술격차를 인식하였다. 당장 앞서 인용된 양헌수도 병인일기에서 직접 교전하며 체감한 무기의 성능차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그래서 나름 군사무기 개발을 추진해 [[면제배갑|방탄복]]과 [[불랑기포#s-2.2|포차]], [[기뢰|수뢰포]], 심지어는 초기 철갑선 수준의 [[철갑선#s-3|목탄증기갑함]]까지 개발하였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무기가 쏟아져 나오는 서양과 기술격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 이는 격차의 원인이 과학지식과 산업기반, 그리고 국가체제 효율의 차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고, 당장의 땜질식 무기개발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한참 후에야 근본적 문제를 인식하고 유학단을 파견하며 개혁에 나섰으나 내부 혼란과 외세 개입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개혁개방의 적시를 놓치고 결국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