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프랑스 측 관점 == 병인양요를 조선의 승리라고 서술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전투를 치른 프랑스군 또한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여겼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병인양요를 명백히 '''패배'''로 규정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 도주'''라고 불렀고, 원정함대의 장병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승전이 가졌던 의의나 가치의 정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겠으나, 조선이 승전했다는 것 자체는 양국이 인정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영국 잡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1870년 9월 24일 기사에서 "프랑스가 조선에서 겪은 패배는 서구 열강들의 약화의 증거이다."라고 서술하였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보병]] 500명과 [[포대]] 1개가 필요한데, 원정함대에서 이들을 더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H.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인의 종군일기에 나오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가 '''프랑스인들이 고려인들에게 패배하여 도망갔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무적이 아니다!'''라는 소문으로 청나라 전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청국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이를 통쾌해하며 조선에게 당한 프랑스의 패배를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분위기에 큰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 1870년 폭동의 시발점이라 해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