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영향 ==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 - 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계급)|소장]](contre-admiral : 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보불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서양]] [[함대]]에 비하면 좀 한직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쁜 자리까진 아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근대화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 골때리는 건 이 당시 사서들 중에는 고문서를 복제해서 원본을 밀반출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 나중에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면서 알려졌는데, 복제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고문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반대한 이유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행각을 감추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했다.]를 누르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약속 이후에 사서들의 반대가 불거졌고 프랑스 정부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엎었다'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름이 한국 측 협상 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사서들의 반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반환 약속 전에 있었던 일이다.]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 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 대여 방식[* 대여라는 명칭에 피약탈국으로서 아니꼬움이 폭발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 / 일본 등의 다른 국가들과 성사되었던 약탈 문화재 환수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영구 대여'는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전쟁을 통해 빼앗은 문화재 등은 별도의 조약으로 국가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반환 의무가 없다.]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과 한국의 다른 문화재를 맞교환하자는 요구를 했고, 당연히 한국 측에선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지라 [[김대중 정부]] 당시 비준 거부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았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하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이 크게 확산되었다.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아편전쟁]] 때처럼 프랑스 군대가 도성에까지 쳐들어올까봐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포와 불안이 크게 번진 사회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상을 뒤엎으려는 엉뚱한 야심가도 나타났으니, 바로 이필제(李弼濟 1825-71)였다.[* 본래는 선달(무과급제생)이었는데, 무과에 급제를 했어도 벼슬 자리가 오지 않고 무기한 대기발령상태라 사실상 실업자였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고학력 백수였던 셈. 그래서 이필제는 평소부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이런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말을 1850년 무렵부터 계속 하고 다녔다. 그런 이필제한테 병인양요와 그로 인한 공포와 혼란은 적절한 기회였다.] 이필제는 병인양요가 터지고 조선 사회에 서양에 대한 공포심이 퍼지자, 이를 악용하여 "앞으로 조선이 서양에 망하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뒤엎고 새로운 조정을 만든 다음, 청나라와 일본을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그 다음 서양 나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필제의 난]](1869~71)'을 일으켰다. 이필제의 난은 1869년부터 1871년까지 2년 동안 5번이나 계속 발생할 만큼,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167~173쪽] 조선군의 경우 신미양요와 달리 전멸은 피하고 의의로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는데 전문가들은 조선군의 근접사격전술이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고 보고있으며 조선군은 주력인 화승총의 사거리가 프랑스가 보유한 라이플에 비하면 짧다는것을 알았기에 성벽에 매복해있다가 프랑스군 병력이 화승총의 사정거리안에 들어오면 일제사격을 가하는 근접사격술을 선보였다. 그결과 문수산성 전투에서 한성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프랑스군에게 27명의 사상자를 안겼고 양헌수가 지휘하는 조선군 사수 120명은 동문과 남문에서 프랑스군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세웠는데 정작 신미양요에서는 이러한 조선군의 근접사격전술이 퇴화하면서 미군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는데 실제로 대모산에서 조선군 사수 200명이 광성보로 향하는 미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했지만 미군이 사거리 범위밖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광성보와 손돌목돈대를 공격하면서 조선군 350명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