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배경 == [[프랑스 해군]] [[극동]] [[함대]] [[사령관]]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로즈]] [[제독]]은 [[병인박해]]의 생존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리델]] [[신부(성직자)|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화를 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정부 인사 일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에 항의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청나라 [[공친왕]]은 조선과 프랑스가 전쟁할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자 일단은 중재에 나서 조선을 변호하기로 하고, 프랑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묻는 한편 조선에도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 오늘날의 [[여권]]에 해당.] 발급을 청하였는데,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 이때까지 서양은 조선을 고려, 즉 코리아라고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이 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하였기 때문에([[병인박해|]])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므로 곤란해하며 중간에서 해결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조선은 여기에 대해서 무시했다. 재미있는건 이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최양업]][* 2번째 [[한국인]] [[가톨릭]] [[사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성품성사|사제서품]] 1년 만에 [[순교]]해 '피의 [[순교자]]'라 불리는 반면, 사제가 된 후 약 12년간 박해의 칼날 아래 활동하다 병사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 불린다.]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당시의 조선과 [[프랑스]]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직전은 아니고, 1851년에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박해는 [[병인박해]]가 아닌 [[기해박해]] 등 그 이전의 박해를 말한다.] >조선 조정이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 >지난해에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샤스탕 신부, [[피에르 모방|모방 신부]]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중국인]]이나 [[만주족|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였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 >"기해년(1839년)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한복|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한국어|조선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하였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 베드로([[피에르 모방|모방 신부]])이고 또 한 사람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라고 진술하였습니다. >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지금에서야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에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각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하였겠습니까? >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 >서양과 조선이 수만 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서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 >헤아려 보십시오. 만일 우리 나라 사람이 당신들의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하였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주문모 야고보 신부)[*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 중 하나.]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우리 나라의 형법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여 있으므로 외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중국 천자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 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 >이상이 조선 조정에서 세실 함장에게 보낸 회답의 요지입니다.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 한편 [[프랑스]]는 [[청나라]]의 중재 시도에 사실 [[병인박해]]는 조선만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의 공동 책임이라고 청나라까지 비난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 왕래가 활발한 점, 조선이 이미 [[선교사]] 처형 계획을 청나라에 통보한 상태였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한 원병을 [[만리장성]]에 대기시켰다는 점을 들며 청나라를 비난했다. 이렇듯 조선과 프랑스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관계가 계속되자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들과 회의를 하는 한편 중재를 거듭 시도해봤지만 프랑스는 이 모든 행위가 사기 행위이자 뻔뻔한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벨로네 공사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 함대를 출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천주교 만주교구장인 베롤 주교도 조선에 가서 항의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어쨌거나 로즈 제독은 벨로네 공사가 본국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음을 두고 기밀누설이자 이적행위라고 비난하고, 조선은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병사인 자신의 소관이라고 주도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벨로네가 본국의 인가를 받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조치하였음을 크게 질책했고, 그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했으며, 그에게 '앞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그를 조선 출정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리고 9월 7일 [[프랑스 해군]]성이 나폴레옹 3세의 공식 명령서를 전달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성은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이 국가적인 모험이니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프랑스 해군성은 "절대로 내륙을 치는 것은 위험하니 치지 말고,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해서 그 주변을 시위함으로 조선에게 프랑스의 입장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만약 상륙 이후 극동함대만으로 조선 토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내륙으로 진공해도 좋다." 하였다.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가 측량을 위해 산둥 반도의 즈푸 항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9월 21일 부평으로 이양선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에 온 정부는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호군 기정진이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매우 단호한 척사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