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한계 === >저들의 '''화포는 사거리가 20리'''[* 약 7.85 km. 조선군이 사용하기도 했던 [[홍이포]]의 사거리가 약 4 km밖에 되지 않았으니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또한 홍이포는 조선군의 주력 화포가 아니였고, 보다 소형인 4호와 5호 불랑기포를 주력으로 사용했다.]나 되었고 포의 앙각에 따라 장단을 조절했다. (중략) 적의 '''총은 사거리가 500보'''에 화승 없이 쏘는데, 쏘는 속도도 귀신처럼 빨랐다. >----- >[[양헌수]], 병인일기 그러나 이 승리를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프랑스군이 동원한 군대는 600여 명에 불과한[* 물론 프랑스와 맞선 조선군도 실제론 거의 대략 천여 명밖에 안 됐으니 교전비는 얼추 비슷하다.] 원정함대였다. 프랑스가 소규모의 분견대만을 보낸 것은 넓게 퍼진 식민지 대비 부족한 원정함대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로즈 제독이 극동함대만으론 조선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위 실추를 감수하고도 뱃머리를 과감히 돌린 것은 추가 증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도 [[양헌수]]의 기습전으로 반격에 성공하기 전까진 패전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라고 하긴 어렵다.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에게 처음으로 근대화된 서양 국가의 무력을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소총은 전장식 강선총인 '미니에 라이플'이었는데, 연사력은 조선의 화승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사거리는 4배에 달했고 명중률 및 살상력도 훨씬 높았다. 또한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위력도 좋은 서양식 대포는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더욱 열을 올렸다. 간혹 사극에서는 프랑스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진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론 그런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였다. 오히려 불과 수백명의 프랑스군에게 문수산성이 함락되고 성 내 누각과 관아의 건물들 그리고 [[강화행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재산피해가 심했다. 다만 병력 수백 명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조선군도 그다지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전사자도 5명 정도를 넘지 않았다고 보고됐다.[* 이는 프랑스군이 조선군을 만만히 보고 야포도 없이 진입했고 조선군도 전면 화력대결은 피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제대로 화력을 퍼붓는 미군에 결사항전한 광성보는 글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즉, 양측 다 인명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확실한 사상자는 14명 정도에 부상자도 상당했을 듯하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도 정확하진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병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한다며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문수산성에선 전사자 3명, 정족산성에선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는 30여 명이라고 보고했다.[* 촌민들이 총에 맞고 쓰러진 사람을 모두 죽었다고 간주했다면 얼추 증언이 맞아 떨어진다. 당시 화승총의 원형 탄알은 생각보다 살상력이 떨어졌고 외과적 조치만 잘 이뤄진다면 후유증이 남고 불구가 될지언정 생환율은 생각보다 높았다. [[미니에 탄]]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총에 맞으면 웬만하면 죽는 시대가 도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