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조판서 (문단 편집) == 상세 == 병조 아래에 무선사(武選司),[* 무관의 인사, [[무과]] 시험을 담당] 승여사(乘輿司),[* [[역참]]을 담당] 무비사(武備司)[* 병사와 병기의 관리, 훈련을 담당]의 3개 사를 두어 일을 분담시켰다. 이 속사(屬司)에는 정5품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 등을 4명씩 두어 일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중대사에는 판서와 참판, 참의 등이 직접 간여하였다. 육조의 서열은 1418년까지는 이-병-호-예-형-공조의 순이어서, 병조가 이조 다음인 제2서열이었는데, [[세종(조선)|세종]] 즉위 이후 이-호-예-병-형-공조로 조정되어 예조 아래인 제4서열 순위가 되었다. 병조판서는 병권을 쥐는 자리인 만큼, 외척이나 공신 등을 비롯한 권신들이 많이 맡기도 했으며 무관 출신들도 병조판서 자리를 많이 맡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국왕의 측근들이나 외척, 공신들의 측근들이나 권신들의 측근들이나 정권을 쥔 당파의 핵심인사들도 병조판서를 많이 맡았다. 정권 보위의 핵심보직이었던 만큼 [[계유정난]] 당시 병조판서 조극관은 궁궐에서 좌찬성 이양,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에 버금갈 정도로 집안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병조판서 자리에 올랐다고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명색이 [[군정권]]자이자 평시 [[군령권]]자지만, [[도체찰사]], [[체찰사]], [[도원수]]를 비롯한 실권자들이 많아 전시에 실병력 지휘권은 없다시피 했다. 임진왜란 시기의 병조판서 [[이항복]]은 [[도원수]] [[권율]]의 사위였고 실제 군령은 남부 [[도체찰사]] [[이원익]]이 내렸기 때문에 북부 [[도체찰사]] [[유성룡]]과 함께 후방지원에 전념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평시 군령권도 [[비변사]]에게 빼앗겨 버렸기에 명목상 하급자[* 둘 다 똑같이 '''정2품이다.''']인 [[오군영]]의 각 대장간의 서열관계도 애매해지게 된다. 병조판서와 각 군영의 대장들이 모두 비변사의 당상이었기 때문이다. 영조 대의 무관 구선행은 병조판서를 지낸 뒤 금위대장이 된 사례도 있다. 병조판서 역시 삼정승([[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갈 수 있는 주요 길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