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참 (문단 편집) === 철도 등장 이후 === 미국 [[남북전쟁]]의 북군이 체급과 산업기반을 이용한 보급전으로 승리한 케이스이다. 남부는 그 특성상 [[농업]] 위주의 사회로 전체적인 체급도 북부에 비해 모자랐고, 북부는 갈수록 우수한 산업기반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전선을 밀어냈으며, 특히 [[철로]]를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큰 기여를 했다. [[보불전쟁]], [[보오전쟁]]기의 [[프로이센]], [[독일 제국]]군이 우수한 보급과 수송능력으로 체급적 한계를 극복하고 [[프랑스 제2제국|두 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강대국을]] 격파했다.[* 물론 이때의 승전이 오히려 패착이 되어 훗날 독일은 초반 수송, 동원, 치중능력을 맹신하고 [[슐리펜 계획|무리한 전략]]을 세우다가 몰락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기에는 [[각기병]], 비타민, 단백질 등 [[식품영양학과|식품영양학]] 지식이 부족해서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보다 더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러시아가 뜻밖에도 일본에 패배했던 이유는 바로 러일전쟁 무렵,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이라[* 심지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완공된다.] 본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만주 지역까지 보급을 보내기가 매우 어려웠던 데다가 전쟁 직전 러시아군 병사들이 사용할 탄약조차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을 만큼 보급에서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군이 압도적인 우세로 러시아군을 이겼느냐 하면 그도 아닌 것이, 일본 역시 러일전쟁 무렵에는 아직 국력에서 총력전을 벌이기 부족해서 러시아군과 벌인 봉천회전 직후에 육군 사령부가 일본 정부에 "포탄을 비롯한 물자 부족으로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가 매우 어렵다. 어떻게든 전쟁을 빨리 끝내달라."라고 애걸하는 통신문을 보냈을 정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에 [[취사병]]이 따로 없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나 1차 대전 초반이 되자 [[참호전]]으로 인해 식량 공급의 양식이 바뀌었다.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면 연료가 부족하다.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은 힘들다.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부족하다. 거기다 조리 과정에서 연기가 발생하면 포격받기 일쑤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중에는 고체 [[알코올]]을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 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1차 대전 후반에는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취사병]]이라는 군사특기가 생기고 야전 취사 장비를 보급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조리병|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유류관리병]]을 포함해 연료에 대한 보급도 1차대전 때 중요해졌다. 이런 점을 경시한 군대에서는 민간인들에게서 문짝이나 가구를 땔감으로 쓰려고 [[약탈]]했다. 물론 불을 피우고 연기를 내면 부대의 위치가 쉽게 노출되며, 2차 대전의 일본군은 이런 것을 [[임팔 전투|외면]]했기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