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참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 즈음 === 수적 우세와 보급을 바탕으로 소련이 승리한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다 건너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M4 셔먼|셔먼]] 전차들 상대하다 말기에는 비축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서 벌인 [[아르덴 대공세]], 보급을 도외시하다 물말아먹은 '''[[임팔 작전]]'''이 대표적 사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반, 당시 30만에 달하는 독일 6군은 생존을 위해 하루 최소 500t의 보급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포위로 보급이 막혔고 결국 최후의 카드로 효율이 떨어지는 공중 수송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전에도 [[데미얀스크 전투]] 당시 고립된 아군에게 공중 수송을 통한 보급이 성공한 적이 있었기에 공중 수송이 가능할거라 믿은 독일군 상층부와 [[괴링]]의 판단도 완전히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데미얀스크에서 포위된 부대는 다 합쳐야 기껏해야 군단 하나 정도였지만 스탈린그라드는 아예 야전군-집단군급 부대가 통째로 갇혀 있었으니 보급해야 되는 물자의 양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을 놓친 것이다.] 공중 수송은 이론상 하루 200~300t의 보급만 가능했으며, 이마저도 이론상 그랬던 것일 뿐 실제로는 여러 악조건[* 수송기의 가동률, 악천후, 행정적 실수, 적 공군 및 방공부대의 위협, 그리고 이착륙 가능한 비행장의 부족으로 보급에 성공한 보급품은 요구량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못해 다수의 동사, 아사자가 발생하며 B집단군의 중추를 담당하던 독일 6군은 무너지고 만다. [[일본군]]은 병참을 경시했다. 군인의 교육이나 승진 등 전반적인 면에 있어 보급에 대한 관심이 낮았다.[* 이는 일본군이 병참과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던 러일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실제로 러일전쟁 와중에 벌어진 봉천 회전에서 일본군은 가지고 있던 포탄을 거의 다 소모해 버려 현지의 일본군 수뇌부가 일본 정부에 보내는 전문에다 '''"전선에 [[군수품]]이 모자라서 더이상 전투를 하기 힘들다. 그러니 [[휴전]]을 하든지 보급을 주든지 아무튼 전쟁 좀 빨리 끝내달라."''' 라고 호소할 만큼 물자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미완성으로 인해 무기와 물자의 보급이 어려웠고 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더 이상 전쟁을 하기가 어렵다 보니 일본과 종전협상을 맺어 일본측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수뇌부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계속 도취한 상태에서 물자와 병참이 부족하더라도 단기결전에 승리하여 전쟁을 끝내면 된다라는 집착에 매달렸다.] 한두명이 정신이 흐려져서 어리석은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인프라가 부족해진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관심이 없으니 투자를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이 보급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느냐 하면, "보급병 따위가 군인이라면 나비나 [[잠자리]]도 [[조류|새]]로 쳐야겠다."라는 말이 버젓이 돌아다닐 정도로 보급을 가볍게 여겼다.] 애초에 일제의 군통수 기관인 대본영이 전투나 작전을 먼저 생각하지 병참은 나중으로 생각했다. [[일본군]]이 잘 나갔던 시절에도 일본군은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약탈|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절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특히 연합군의 공격으로 보급이 끊기자 식량을 약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육]]을 먹는 전쟁범죄가 자주 발생했다. 다만 이런 막장스러운 [[일본군]]이 다른 쪽으로, 현대전에서도 전투력을 어느 정도 포기한다면 [[둔전]]이 유효하다는걸 보여주었다. 둔전 하나로 식량 보급을 유지했기 때문. 물론 잘 했을 때 이야기이며, 무기 보급은 별개의 문제이고(...). [[이마무라 히토시]]가 둔전과 현지 유화 정책, 상거래로 병참을 유지한 몇 안되는 케이스. 병참 능력이 모자라거나 아예 도외시하기도 했던 추축국과 반대로 연합군에서는 --물주-- 미국의 엄청난 병참능력으로 보내 준 [[스팸]], 초콜릿 캔을 전투가 가장 수세일때까지 보급받으면서 전투를 치렀다.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 중 병참을 [[최적화]]하기 위한 연구가 [[산업공학]]을 낳았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소련의 수송 경로는 [[최적제어론]]을 연구한 [[수리경제학]]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