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병/역사 (문단 편집) == 기원전 5~3세기 == * 고대 지중해 세계 관련 서술은 존 워리(John Warry), 『서양고대전쟁사박물관』 (르네상스라이브러리)를 참고 지중해에서 대규모 병력이 보다 체계적으로 맞붙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로, 어느새부터 도시 간에 무력을 겨루기 위해서 중무장한 보병인 [[호플리테스]]들이 방진을 이루어서 대열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면서 [[팔랑크스]]가 등장한다. [[파일:Phalanx2.jpg]] 그리스 [[팔랑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마술이 잘 발달하지 않고, 쇠뿔과 다른 재료를 합쳐 만든 [[각궁]]이나, 투창, 투석무기도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전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생산활동을 오래 못할 위험이 있는 경보병들의 유격전보다는 중보병들간에 백병전으로 단기에(단기라도 해도 전투에는 몇 시간이 소요되었다.)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몇몇 전투는 경보병이나 기병조차 없이 중보병만으로 치러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새화된 성곽은 있었지만, 중앙아시아 같은 정교한 포위전이나 중장비를 이용한 공성전은 거의 없었다. 중보병 간 백병전에서는 보통 보병이 전열을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쪽이 승리할 확률이 높았고, 전투의 사상자도 주로 한쪽의 대열에 이탈자가 생겨 붕괴되고, 적에게 추격당할 때 많이 발생하였다. 대열을 유지하기 위해 강도 높은 제식훈련을 하고, 부상을 방지하고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큰 방패와 무겁고 육중한 갑옷 그리고 귀와 얼굴을 모조리 가리는 투구, 정강이 받이 등을 착용하였다. 전쟁에 참여하는 보병은 보통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시민들은 시민권과 함께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리스군]]에 복무했다. 보통 각자 '''개인 재산으로 장비를 사서 참가하였기 때문에'''. 장비와 무장수준, 그 밖에 갑옷과 방패의 색이냐 문양에서 개별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났다. 개인장비를 구매할 여력이 없으면 [[투창]]이나 [[투석]]을 겸해 맨손으로 투입되기도 하였다. 주로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호플리테스]]가 되여 [[팔랑크스]]를 이루고 가난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경무장 투창병은 아콘티스타이(Akontistai)라 불리웠다. 이들은 신분도 낮았기 때문에 진지공사 이외에 허드렛일 등 잡일도 도맡아 했고, 또 이들 말고도 오늘날의 헝가리나 불가리아 지역의 트라키아나, 스키타이에서 투창병과 궁병을 용병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에서는 중보병대가 주력이었다. 반면, 동시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인도는 기병의 기동전과 활, 투석, 투창 등의 투사무기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경보병의 비중이 높았고, 중보병이라도 황제의 주력인 [[아타나토이|이모탈]]조차 방패와 창이 고작에 호플리테스처럼 투구와 정강이받이 등 방어구를 잘 갖추지는 못하였다. 원인은 전투의 성패가 주로 경보병과 기병의 사격 및 유격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많고 중보병의 참여비중이 비교적 크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추후 [[페르시아 전쟁|그리스와의 전쟁]]에서, 그중 특히 [[마라톤 전투]]에서 원거리 무기를 이용한 유격전이나 사격전으로 방패와 갑옷으로 잘 무장한 팔랑크스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도리어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페르시아제국에서도 그리스 중보병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그리스에서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전투에서 경보병과, 기병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이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간에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에는 경보병과 기병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특히 [[필로스-스팍테리아 전투]]나 [[레카이움 전투]]에서는 중무장한 스파르타의 중보병대가 매복한 아테네의 경보병대와 맞닥뜨려서 지형지물과 투사무기를 이용한 유격전에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때 아테네군은 일부로 무기를 쥐어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는 스파르타군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파일:yhyhb.jpg|width=500]] 이피크라테스의 군제개혁 후 아테네 병사들. 큰 그림이 중보병, 작은 흑백그림이 경보병인 펠타스트다. 레카이움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중보병을 격퇴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는 이런 전투 경험에 착안하여 보병의 군제를 개혁한다. 중보병대는 기존의 거대한 방패와 정강이받이, 무거운 청동갑옷과, 눈코입을 제외하고 얼굴을 다 가리어 무겁고 청각을 제한하는 투구 대신, 작고 가벼운 방패를 들고, 시야와 귀과 잘 트이는 보다 가벼운 투구를 착용하고, 정강이 받이는 착용하지 않으며, 청동갑옷은 린넨(아마포)으로 만든 가벼운 갑옷으로 바뀐다. 대신 창의 길이가 3.6m로 기존의 창인 도리보다 더 길어져, 백병전을 치룰 때 가까이서 싸우기보단 길어진 창대를 이용해 멀리 싸우게 하여 방어구의 영향력을 덜받게 하였다. 반대로 경보병인 팰타스트는 장기간의 전투에서 생존율을 늘리기 위해 금속투구를 쓰고, 더 커다란 방패를 쥐었으며, 또 투창뿐만이 아니라 백병전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보다 긴 도검과 찌르는 창이 지급되었다. || [[파일:phalanx.jpg|width=500]] || ||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 이피크라테스의 군제개혁에 영향을 받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2세는 마케도니아의 군제를 개혁하여 3.6미터보다 더 긴 4.5~5.5미터 길이의 [[사리사]] 장창을 쥔 [[팔랑크스]]를 창안하였다. 이피크라테스가 개량한 팔랑크스도 긴 창을 가졌지만, 비교적 덜 촘촘한 대열에서 창대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고 내려찍는 방법도 썼었으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양손을 이용해 창을 허리춤으로 잡는 대신, 앞뒤로 5열 이상의 인원이 한꺼번에 정면에서 창대를 이용해 찌를 수 있도록 보다 정교한 대열을 구사하였다. 또한 양손으로 창을 쥐기 쉽게 팔랑크스의 방패에는 목줄이 달려, 왼팔이 방패의 하중을 덜 받게하였다. 단 5개 열이 한꺼번에 정면을 향해 있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방향 전환이 어렵고 측면과 후방을 공략당할 위험이 높았는데, 마케도니아에는 히파스피스트(Hypaspist 혹은 Hypaspistai)라는 병과가 기병과 다른 경보병들과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과 후방을 보호 및 보조하였다. 정강이받이와 투구, 흉갑, 사리사를 든 병사들 것보다 큰 방패 등으로 비교적 잘 무장한 이들은 3.6미터라는 비교적 짧은 창을 역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쥐고 싸웠다. 마치 더 이전시대의 호플리테스와 비슷한 무장이지만, 히파스피스트 보병들은 주로 측면과 후방에 위치해서 호플리테스들보다 더 넓은 대열로 빨리 그리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아군 방향으로 돌입해오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의 진입을 막거나 보호하는 역할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마케도니아 군에서는 보병으로서 궁병과, 투석병, 투창병을 또 별도로 운용하고, 기병의 돌격전술과 함께 모든 병종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면서 제병협동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이후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제국과 이집트를 정복함에 따라 이 지역의 군사문화에도 영향력을 끼친다. [[파일:close-up-view-of-light-infantry-clay-soldiers-museum-of-terra-cotta-c51wmt.jpg|width=500]] 진나라의 병마용갱. 무장수준이 제각각이다. 고대 중국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보병이 개인재산으로 무기를 사기도 해서 한자성어 [[모순]]은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에서 유래했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야전에 주력하다가, 춘추전국시대부터 비옥한 농경지와 생산성, 강력한 국가권력을 갖추고 대규모 인원을 징발하여 보병부대를 편성하고 대회전을 이루는 일이 늘어났다. 이 시기 기본적인 보병전술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지중해나 중앙아시아에 비해 그렇게 상세한 문헌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고, 그나마도 [[병마용갱]]이 발견되면서 조금이나마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 보병은 창이나, 도검, 도끼말고도 보병용으로 [[꺾창|과]]나 [[극(무기)|극]] 같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거나, 가로로 베고, 찍을 수 있는 장병기도 많이 쓰였다. 지중해나 중앙아시아에서 쓰이던 것처럼 길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장창은 없고, 창의 길이는 대체로 2~3미터 정도였다. 특히 유목민족인 흉노가 오래전부터 우수한 기마술을 바탕으로 활을 들고 쳐들어오는 일이 많아, 일찍부터 기병부대와 함께 다수의 궁병이 편성되었다. 중국만의 특징은 궁병 중에서도 기계적으로 복잡한 장치를 쓰는 [[석궁]] 즉 노를 사용하는 병력이 꽤 많았다는 것인데, 노가 활에 비해 만들기는 어렵지만 배우기는 훨씬 쉬웠기 때문에 진나라 이후 강력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대량의 수공인들을 동원해 대규모 궁수부대를 양성하여 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