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빙사 (문단 편집) == 일정 == 7월 15일부터 출항하여 중간 기착지로 일본에 들렀는데[*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 - 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다.] 이들로만 보내기는 좀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 화성 운하설의 그 로웰 맞다. 후술된 내용과 해당 항목도 참고하자.]과 그의 비서 겸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郞)가 동행하게 된다.[* 이는 [[한국어]] ↔ [[영어]]가 바로 직통되는 통역관이 당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영어 ↔ [[중국어]] ↔ 한국어, 혹은 영어 ↔ [[일본어]] ↔ 한국어로 통역한 셈. 실제로는 통역의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일본어 중역과 중국어 중역을 모두 참조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사실 보빙사의 미국 방문 기록이 오늘날 한국 측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보빙사의 주요 인물인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의 실패 후 역적으로 단죄되어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국 내 일정은 신문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충실히 기록했기에 현재 보빙사의 미국 일정만큼은 어느정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일본에 들렀던 보빙사는 8월 15일에 출항하여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도착한다. 당연히 미국 정부에서는 사절단을 국빈으로 예우했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었는데,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대접받으면서[* 이때 [[시카고]]에서 남북전쟁 당시의 명장이자 후에 [[셰리든 전차]]에 명명되는 필립 셰리든의 영접을 받았다.] [[워싱턴 D.C.]]에 와 보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9월 18일이 되어서야 아서 미국 대통령과 조선 외교 사절의 첫 만남이 성사되게 된다.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20354437.jpg]] 그려진 세 명은 아마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으로 보인다. 절을 받는 사람은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이다. 자세한것은 [[체스터 A. 아서]] 목록 참조.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지 않는것은 당연히 당시 보빙사 일행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는 적절한 예절인지 토론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http://sf.koreatimes.com/article/20190917/1269389|#]] 그런데 이 그림의 정확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민영익]] 등 아서 대통령을 알현한 일행은 [[관복]]으로 갈아입었기에 애초에 저런 복장이 아니며, 모자 역시 관모여야 한다. 또, [[뉴욕 타임스]]의 1883년 어카이브에 따르면 민영익 등 3명이 들어오자 그들은 서로를 향해 bow하고(여기서 bow를 절로 보면 아서 대통령도 절한 것이 된다) 대통령과 악수한 후 서양식으로 접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절을 한 이후 곧바로 악수도 했다는 소리가 될 수 있다. 조선식으로 먼저 예법을 차리고 서양식으로 예법을 차렸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때 다른 수행원들은 모두 문 밖에서 벽을 바라보며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외교 사절이 접견할 때 권한이 낮은 수행원들이 취해야할 행동이었다. 따라서 위 삽화는 1) 문밖에서 엎드려 있던 사람, 2) 서양에 알려진 조선의 양반 복장 등을 바탕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단, 민영익 일행은 대통령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고 복수의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식으로 '절을 하기는 했다'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분석이 있으니 참조. [[https://arca.live/b/dogdrip/11892431|#]] >Each evening finds the Embassy thus engaged:note books are produced, discussions follow ans a few additional questions are asked of those who are available to clear up doubtful points or correct others. >그들은 매일 밤 모여 메모한 것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며 의심나거나 자신들이 질문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 >뉴욕타임즈 1883년 10월 13일 당시 보빙사를 수행했던 Clayton Foulk의 기록을 보면, 보빙사 일행은 다소 허세를 부리고 배 멀미를 하는 생리적인 문제는 보였을지 몰라도, 식사 및 공연 등 다양한 일정에선 최대한 세련되게 처신하고 그들이 본 것 역시 상세히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문화 부적응 [[꼰대]] 같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보빙사 대표들이 이미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외국 문물에 대해 어느정도 익숙해있던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 1887년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 때문에 미국에 파견된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 [[이하영]] 등은 상대적으로 나이든 축에 속해서 그랬는지 보빙사 일행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인솔한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면서, 특히 이상재가 많이 '더티'(비유가 아니라 원문에 그리 쓰여있다.)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견학도 하고 [[차관]] 요청도 하고 [[기술]] 전수 요청도 하고 [[박람회]] 개최 협조 요청도 하는 등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10월 12일 귀국 인사차 [[백악관]]에 방문하고, 아서 대통령은 [[군함]] 한 척을 내주어 본국까지 타고 갈 것을 권한다. 이들이 방문한 곳은 워싱턴 소방서, 뉴욕 브로드 웨이, 에디슨 전기회사, 뉴욕생명보험회사, 미국 농무부 연구소, 로웰 산업단지 등 산업 전반에 걸쳐있었다. 그래서 세 그룹으로 갈라졌는데 [[민영익]], [[서광범]], [[변수(1861)|변수]]는 이 군함을 타고 [[유럽]] 등으로 건너가 각국을 순방하고 1884년 5월 귀국했다. 나머지 [[홍영식]] 및 수행원은 바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 귀국해 국왕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퍼시벌 로웰|로웰]]이 따라와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보빙사를 계기로 조선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과 졸업생을 남기게 되는데,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근대 시기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기도 한 [[유길준]]은 민영익의 허가 아래 미국에 남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보스턴 대학에 입학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하버드 대학 입시 준비 중 2년 여 만에 귀국했다. 자세한 그의 행적은 [[유길준]] 문서 참조. 최초의 졸업생은 [[변수(1861)|변수]]이다. 그는 귀국 후 훗날 [[갑신정변]]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김옥균의 암살로 1년간 일본에서 숨어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최초의 미 대학 조선인 입학 및 졸업생이 되지만 열차사고로 30세에 요절한다. 자세한 내용은 [[변수(1861)|변수]] 문서 참조. 여담이지만 점심 메뉴로 [[프라이드 치킨]]을 시켜먹었다고 한다. 한국이 미국의 프라이드 치킨을 본따 전 세계적으로도 치킨의 성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참고로 유럽을 보기로 한 민영익 등의 일행은 대략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등을 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 제국|인도]], [[싱가포르]], [[일본 제국|일본]] 등을 거쳐 왔다. 즉, '''조선인 최초로 거의 [[세계일주]]를 한 셈'''.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구경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유행했던 피라미드 등반 및 내부 탐사는 모두 거부했다. 그도 그럴게, 유학을 배운 선비로서 남의 나라 왕릉을 밟고 올라가거나 그 안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유명 블로거 迪倫이 보빙사 일행의 [[http://dylanzhai.egloos.com/category/1883%EB%85%84%20%E7%99%B8%E6%9C%AA%E7%B4%90%E7%B4%84%E4%BD%BF%E8%A1%8C%E9%8C%84|미국 일정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고 있으니 역덕후라면 참고해보자.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 에서 '엘리베이터를 처음 탄 조선인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당황했다' 라고 하는 일화가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 이 쓴 『조선체류기』로부터 보빙사의 이야기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1888년 초대 주미 미국 공사로 부임한 [[박정양]] 일행이 겪은 일을 당시 그들을 수행했던 알렌이 자신의 책에 남긴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