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은군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보은군 군기(1977-2001)글자포함.svg|width=200]] 1977년 제정 이래 2001년까지 사용한 보은군의 깃발 충청북도 [[청주시]]-[[대전광역시]]-경상북도 [[상주시]]를 연결하는 위치이면서, 전체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지형인 탓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였다. 백제가 3세기 후반 ~ 4세기 초 기간 내내 충북에 잔존한 마한 목지국 지지 세력과 격전을 치를 때 목지국 잔여 세력과 백제 사이의 중요한 전장이었고, 마찬가지로 아신왕의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연거푸 크게 졌던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중요한 요지였다.[* 보은-괴산-진천 일대까지 고구려가 밀고 들어오는 탓에 한성백제가 한성이 공함되기도 전에 고구려에게 충청도 전체를 함락당해 그야말로 허리가 부러지기 일보직진이었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다만 개로왕에게 개인적으로 강한 적개심이 있었던 장수왕이 전략을 바꿔서 한성부터 먼저 함락하기로 마음을 바꿨을 뿐이었다.] 4세기 중반 고구려의 속국인 신라의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경북 북서부를 수복함과 함께, 잔존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몰살하는 과정에서 이 보은 일대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후 장수왕이 475년부터 작정하고 준비한 한반도 남부 정복 전쟁에서도 신라는 괴산과 대전 동부는 고구려에게 내주면서도 보은, 영동 만은 고수했다. 이후 신라는 백제의 동의 아래 '''[[삼년산성]]'''을 축조하여 대고구려 최전방 요새를 쌓고 고구려에게 청주-세종-대전 축선을 잃고 멸망 위기에 몰린 백제를 동쪽으로부터 지원해주게 된다. 신라 초기 보은군의 이름이 삼년산군(三年山郡)이었던 건 매우 당연한 얘기. 이후로 나제 동맹이 결렬된 후 보은군 북쪽 대부분이 신라 영역이 된 이후엔 대백제 최전방 요소로서 기능하게 되는데, 삼년산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신라의 백제 지원이 백제를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걸 생각해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제 성왕이 신라에게 붙들려 죽게 되는 지역이 바로 이 삼년산성 근처였다. 《[[삼국사기]]》에 이렇게 여러 번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요새. 신라 [[경덕왕]] 때 삼년군(三年郡)으로 바꾸었다. [[9주 5소경]] 중 [[상주]]에 속해 광역행정구역은 지금의 경상도 쪽이었다. 이후 900년대 초에 후백제가 추풍령 일대 신라 정예부대 및 요새들을 그럴듯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접수할 때[* 견훤이 신라군에 오랫동안 복무했고 명성도 대단했기에 그 인연으로 이렇게 했을 개연성은 있으나, 어떤 문헌 사료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 추측의 영역에 머물 뿐이다.] [[후백제]]의 영역으로 귀속되었고, 보은 지역은 백제의 악몽이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번에는 신라와 고려의 악몽이 된다. 후백제군이 보은 삼년산성에서 출발하는 진격 루트로 고려와 신라에게 여러 번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며 그 지역적 중요성을 철저하게 입증했기 때문. 이전 백제는 대전 방향에서 동진이 예상되는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움직임 탓에 처절할 정도로 종심 방어 체제를 갖췄고 그럼에도 여러 차례 타격을 입은 끝에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으나, 후백제는 보은군을 철저하게 틀어쥐고 있었던 덕택에 적어도 동쪽 방면 국경은 거의 걱정할 일 없이 충북과 경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그 결말은 바로 [[서라벌 기습]]이었다. 고려의 왕건 또한 삼년산성 근처에서 결정적으로 후백제에게 대패한 적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후삼국통일 이래로 한반도 남부가 한 지역체 아래에서 내내 있었던 덕택에, 보은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될 기회는 없게 된다. 고려 시대에도 [[경상도]]에 속해 보령(保齡)[* 이후 齒가 사라진 保令으로 와전되었다.]이라고 불렸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옮겨진 것은 조선에 들어서였다. 보은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태종(조선)|태종]] 때 보은현으로 칭해진 이후이다. [[충청남도]]에 있는[* 물론 당시는 남북도 구분 없이 같은 충청도 소속이었다.] [[보령시|보령]]과 혼동이 생겨 다시 보은으로 칭해졌다. 1906년 청산군(이후 [[옥천군]]에 흡수)에서 현 내북면 지역을 편입하였다. 1914년 회인군을 흡수하였다. 1947년 속리면이 내속리면, 외속리면으로 분리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였던 1977년 2월에는 보은군이 임시행정수도로 1차 후보군으로 선정[* 이 때 같이 선정된 지역이 [[천안시|천원]][[청주시|지구]], [[진천군|진천지구]], [[충주시|중원지구]], [[공주시|공주지구]], [[대평동(세종특별자치시)|대평지구]], [[부강면|부강지구]], [[논산시|논산지구]], [[옥천군|옥천지구]], [[금산군|금산지구]]였다.]됐으나, 2차 후보군에서는 장기지구(공주-연기, 기존 공주지구와 대평지구를 조합), 천원지구(천안-청주), 논산지구(논산)에 밀려 탈락했다. 2007년 내속리면이 속리산면, 외속리면이 장안면, 회북면이 회인면으로 개칭되었다.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 운흥리(일명 '용화'라 불리는 지역)는 상주보다 보은과 더 가까워, 한때 보은군 편입을 요구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