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응우옌잡 (문단 편집) == 통일 이후 == 보응우옌잡은 [[베트남 통일]] 이후엔 정치 권력을 상실했다는 게 그에게 패배한 서방 여러 나라들의 주장이지만 늘그막까지 영화를 누린 것으로 봐선 그렇지도 않았던 듯하다. 사실 호치민이고 보응우옌잡이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주도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50년대 말 토지정책의 실패로 인해 북베트남이 내전 상황에 처하자 책임을 지고 1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비중 있는 행동은 애초에 많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 내부 권력투쟁에서 이를 기회로 대두한 [[레주언]] 같은 남부 베트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에게 실권을 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전쟁 이후에 권력을 잃었다는 건 사실관계는 안 맞는 셈. [[베트남 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전쟁 기간부터 이미 실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종전과 베트남 통일 후에도 계속 국방부장 직책을 맡았으나 [[친중]]파였기 때문에 [[1978년]]에는 [[중국]]을 자극할 수 있었던 [[캄보디아]] 침공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베트남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권이 별로 없는 부총리로 전임되었고 국방부장 직책을 중국-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반띠엔중]]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군권을 잃었다. 이후 [[친소]]파가 득세하자 [[1982년]]에 완전히 실각했고 정치국원 자리도 잃었다. 다만 이는 "나이가 많아 실권을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1991년]]까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부총리로 있으면서 회고록이나 군사학 저작을 쓰는 등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파일:external/100years.vnu.edu.vn/nguyen%20duy%20quy_2.jpg]] 1992년 [[베트남 국회]]에서 모인 베트남 전쟁 당시의 베트남 인민군 3거두. 오른쪽부터 국방부장 겸 총사령 보응우옌잡대장, 총참모장 [[반띠엔중]] 대장, 총정치주임 [[쭈후이먼]] 대장. 맨 왼쪽은 하노이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철학자 응우옌주이꾸이(Nguyễn Duy Quý). [[파일:external/www.petrotimes.vn/mcnamara-giap220120819222606.jpg]]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함께 [[1995년]]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적장이었던 [[미국]]의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를 만나서 전쟁의 단초가 된 [[통킹만 사건]]을 주제로 환담하기도 했다. 맥나마라는 "그때 정말 무슨 일 있었습니까?"고 물었고 보응우옌잡 장군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고령인데도 베트남 전쟁 당시 매설된 엄청난 수의 [[지뢰]]를 제거하는 계획의 자문을 맡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2013년]]에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megafun.vn/images1014483_linhcuudaituong36.jpg]] [[베트남 정부]]는 국장(國葬)을 거행해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전쟁영웅을 추모했다. 유해는 고향인 꽝빈(Quang Binh) 성의 해안가에 마련된 묘지에 안치됐는데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관심이 있다면 [[https://blog.naver.com/baekjelove1/221524050394|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블로그의 방문 후기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로부터 50여 일이 지난 2013년 11월 말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 장군도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