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국장공주 (문단 편집) === [[충숙왕]]의 구타가 사인인가? === 복국장공주가 병을 앓고 불과 20일도 채 안 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나라]]에서는, 복국장공주의 사인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하여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원인종|인종]]은 선사(宣使) 이상지(李常志)를 보내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조사하도록 했다. [[고려]]에 도착한 이상지는 [[궁녀]]였던 쿠라치(胡剌赤)와 [[요리사]] 한만복(韓萬福)을 억류하여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조사했다. 그런데 그 때 한만복의 입에서 충격적인 증언이 나오게 된다. 한만복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 '''"지난 해 8월 국왕이 연경궁으로 덕비(德妃)를 찾아간 것을 공주가 시샘하다가 왕에게 맞아 코피를 흘렸습니다. 9월에도 왕이 묘련사(妙蓮寺)에 갔다가 공주를 때렸는데, 에센부카(於侁夫介) 등이 말린 일이 있습니다."''' > -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2 [[충숙왕]] 후비 즉, 충숙왕은 복국장공주를 찾지 않는 대신 덕비를 찾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복국장공주가 [[질투]]를 했는데, 충숙왕이 [[가정폭력|복국장공주를 코피가 나도록 두들겨 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왕이 공주와 함께 묘련사란 [[절(불교)|절]]에 행차했는데, 그 때에도 충숙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또 복국장공주를 마구 때려서 호종하던 [[몽골인]] 관리인 에센부카란 인물 등이 충숙왕을 뜯어말렸다는 것이다. 결국 쿠라치와 한만복은 원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증언을 들은 원 인종은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구타해서 죽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이에 고려는 크게 난처해졌다.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으니, 원나라 공주와 사이가 소원한 것도 모자라 원나라 공주를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원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충숙왕은 백원항(白元恒), 박효수(朴孝脩) 등을 시켜서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한만복이 거짓말을 했다"고 변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1320년 2월에 복국장공주를 '정화공주'(靖和公主)로 추증하고 후히 장례를 치르며 원나라의 의심을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이 사건을 조사하던 [[원인종|원 인종]] 역시 승하하면서, 결국 이 사건은 유야무야 묻히게 되어 현재까지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