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국장공주 (문단 편집) === 학계의 주장 === 사건이 일어난지 [age(1319-11-08)]년이나 지났기에 현재로서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원나라]]가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의심하게 된 한만복의 증언을 '과장된 증언'이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즉, 한만복의 증언대로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몇 번 손찌검한 건 사실일지 몰라도,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처음부터 복국장공주의 사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한만복의 과장 섞인 증언을 듣자 결국 '충숙왕의 구타 때문에 복국장공주가 죽었다'고 믿어서 일이 커지게 된 것이라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즉, 일종의 [[확증편향]]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당시 [[고려]]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에 예속되어 있었던 반독립(半獨立)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인 복국장공주를 싫어해도 죽을 정도로 마구 두들겨 팬다는 건 너무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다. 충숙왕의 아버지 충선왕만 해도 [[계국대장공주]]를 대놓고 싫어하며 박대했다가 그녀의 모함으로 폐위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훗날의 일인데,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도 [[경화공주]]를 [[강간]]한 것이 들통나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원나라로 귀양을 갔으며, 귀양가던 중에 30세로 죽었다. 경화공주가 충혜왕의 서모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때려 죽인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 일을 생각해 봤을 때 정말로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두들겨 패죽였다면 과연 왕위를 무사히 유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즉, 정치적으로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몇 번 손찌검한 적은 있었을지 몰라도, 죽을 정도로 심하게 구타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2번째 이유는, 복국장공주는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정략결혼]]한 사이였고 부부 관계도 나빴지만, 복국장공주가 건강이 악화되자 충숙왕은 나름대로 사원과 도관(道觀) 및 개인의 집으로 자주 거처를 옮기며 공주의 병이 낫길 기원하였다. 또 《[[고려사]]》를 보면 알겠지만 본래 그 사서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려를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한 문제점이 있다. 특히 고려 말기 국왕들을 보면 꼭 어딘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들인 양 서술되어 있다.[*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은 말할 것도 없고, 개혁 군주로 이름난 [[공민왕]]조차도 말년의 모습을 보면 [[동성애]]에 [[관음증]]까지 있는 변태 성욕자로 묘사되어 있다.] 충숙왕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사》 속에 묘사된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도 대단히 놀기 좋아하고 정사를 게을리하는 [[암군]]이었으며 함부로 살인까지 한 악당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충숙왕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사서인데, 만약 정말로 복국장공주의 사인이 충숙왕의 구타 때문이라면 직접적으로 그렇게 서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에서도 "복국장공주가 죽을 무렵에 그녀의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충숙왕의 구타가 복국장공주의 직접적 사인이라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복국장공주 이외에도 고려에 시집온 몽골 공주들은 그나마 60세 정도까지 살았던 [[덕녕공주]]를 제외하면 모두 단명했고, 대부분 남편들보다 더 먼저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한 [[향수병]]과 고려와 몽골의 다른 환경으로 인한 [[풍토병]] 등이 꼽힌다. 복국장공주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단지 충숙왕이 자주 손찌검을 했던 사실로 인해 폭행치사 의혹이 불거진 것이란 게 학계의 주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