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성군 (문단 편집) === 후손 === 동생으로 [[혜순옹주]]와 [[혜정옹주]]가 있다. 부인은 현감 윤인범의 딸인 [[파평 윤씨]]이며 슬하에 딸 이운환 한 명을 두었다. 두 동생과 딸은 복성군 처형 후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세자(훗날 [[인종(조선)|인종]])가 눈물로 간곡히 용서를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생들은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이 되었다가 인종 재위 때 복성군과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 윤씨 부인은 [[작서의 변]]이 터지기 전인 1530년에 해산 도중 사망했다. 딸인 이운환은 장예원 사평인 최예수와 결혼했다. 아들없이 죽어서 [[명종(조선)|명종]]은 [[덕흥대원군|덕흥군]][* [[명종(조선)|명종]]과 [[덕흥대원군|덕흥군]] 둘 다 복성군의 이복동생이다.]의 3남 [[선조(조선)|하성군]]을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입적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0408001_003|#]][[https://ko.wikipedia.org/wiki/복성군|#]][[http://rfo.co.kr/view_party.php?refnum=088|#]] 그러나 1567년 하성군이 [[명종(조선)|명종]]의 아들로 입적한 뒤 [[선조(조선)|선조]]로 즉위하면서, 복성군의 대는 다시 끊겼다. [[선조(조선)|선조]]는 복성군의 새 양자로 이복 동생 [[해안군]]의 아들인 오강군을 입적시켰다. 하지만 오강군도 적자가 없어서[* 후에 이복동생인 서천군 이금(西川君 李錦)의 서차남인 화원군 이효성(花原君 李孝誠)을 양자로 들였다.], [[선조(조선)|선조]]는 자신의 3남인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입적시켰고 [[의안군]]이 요절한 후에는 4남 [[신성군]]을 후사[* 가계도를 따지면 복성군 다음에 [[신성군]]을 양자로 삼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즉 가계 상으로 조손(祖孫) 관계로, 봉사손(奉祀孫) 내지는 시양손(侍養孫)으로 봐야 마땅하다. 왕족에 대해 봉사손을 세운 경우는 [[광평대군]]이 그 예로, 그는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다.]로 삼게 했다. 그런데 이게 '복성군의 양손자로 들인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오강군의 양자로 삼는다'는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어쨌든 [[신성군]]이 복성군의 양손자가 되었는데, 그 역시 아들없이 죽어서[* 딸 외에 후사가 없다.] [[원종(조선)|정원군]]의 3남 [[능창대군|능창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능창대군|능창군]]이 역모에 말려 [[광해군]] 때 사사당하자[* [[능창대군|능창군]]이 역모로 죽지 않았다해도 이 집안 역시 서출인 외동딸 이외엔 후사가 없어 어찌되었든 양자를 다시 들여야 했었다.] 다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3남인 평운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평운군의 적손(嫡孫)이 없어서 [[양원군]][* [[성종(조선)|성종]]의 16남(서14남).]의 5대손인 이유석의 3남을 입양했는데, 그가 바로 함릉군 이직(咸陵君 李㮨)이다. 그런데 함릉군 가문의 원래 뿌리는 [[경명군]]파[* [[성종(조선)|성종]]의 11남(서7남).]로, 양원군파로 입계한 것이다.[* 함릉군의 고조부인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은 경명군의 친손자이다.] 다만 평운군에게 서자 함계군 이춘(咸溪君 李櫄)이 있기에 현재 남은 복성군 후손들은 실제로는 [[경명군]]과 [[경창군]]의 후손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