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양흥 (문단 편집) == 생애 == 어렸을 때부터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있는 편으로 [[손권]]의 대에 상우현의 령이 되었다가 상서상조까지 승진했으며, 그 후 오관중랑장이 되어 촉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계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제갈각]]의 정책으로 떠돌던 [[손휴]]가 단양태수 이형의 핍박으로 회계에 오게 되어 복양흥과 손휴는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258년에 손휴가 즉위하자 그 친분으로 중앙으로 들어와 태상, 위장군, 평군국사, 외황후가 되었으며, 260년에 엄밀이 단양에서 간척사업을 해 포리당을 만들 것을 건의하자 손휴가 조서를 관리들에게 상의하도록 했는데, 모두 노력을 많이 해도 이룰 수 있다는 보증이 없다고 했지만 오직 복양흥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 많은 병사와 백성들을 모아 시공했지만 공정 비용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가 노역에 견디지 못한 인부들이 자살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원망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262년에 손휴는 복양흥을 승상으로 임명하면서 옛날에 자신이 힘들 때 은혜를 입은 것을 갚는다고 [[장포(손오)|장포]]와 복양흥에게 정무를 맡겨 장포는 궁궐의 부서를 주관하고, 복양흥은 군사나 행정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되자 백성들이 실망했다.[* 보통 자신의 열전에는 나쁜 내용은 일부러 빼기 마련인데 이런 내용이 다 자신의 열전에 있을 정도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안 좋다고 해석할 수 있다.] 263년에 촉나라가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둔전하고 있는 농민 1만 명을 군사로 뽑을 것을 건의한다. 264년에 손휴는 자신의 아들 [[손만(삼국지)|손완]]을 후계자로 할 것을 부탁하면서 붕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욱]]의 추천으로 장포와 함께 [[주부인]]에게 부탁해 [[손호]]를 황제로 즉위시켜 복양흥은 이 공으로 자신의 직위에 시중과 청주목이 더해진다. 그러나 얼마 후에 손호의 정치에 장포와 함께 실망해 만욱이 이 사실을 손호에게 알리면서 광주로 유배를 보내졌으며, 그 와중에 복양흥과 장포는 손호가 보낸 사람에게 살해된 것과 동시에 삼족이 멸족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