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어 (문단 편집) === [[대한민국|한국]] === [[대한민국|한국]]의 경우는 [[김해]] 수가리 [[조개무덤]]에서 대구, 돔, 농어, 복어 [[뼈]]가 출토된 바 있으며, 창녕의 [[교동 고분군]] [[가야]]시대 무덤에서도 복어 식용의 흔적이나 백제 왕실의 복어뼈 흔적,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있어 고대부터 현재까지 먹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듯이 복어 금지령은 없으나 일부 조리사만 다루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하돈([[河]][[豚]])[* 지금도 중국에서는 河豚이라는 명칭을 쓰며, 테드로도톡신 역시 '河豚[[독소|毒素]]', 즉 '복어독'이라고 칭한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성종 24년(1493년)에는 오늘날의 [[진해구|진해]]에 해당하는 웅천에서 복어가 [[굴(어패류)|굴]]과 [[미역]]에 알을 낳는 통에 해안가 주민 2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어간 일로 인하여 해산물을 잡는 걸 경상도 관찰사 이계남이 금지하다가, 어민들이 생계가 막힌다고 해당 고을 수령이 결사반대하여 조정에까지 해당 사고에 대한 문의가 올라왔을 정도였다. 당시 우승지 벼슬을 하던 한사문(1446~1507)은 수령이 반대한 이유가 정당하다며, 아무래도 굴이나 미역만으로 사람이 그렇게 죽어나갈 리가 없으니, 필시 복어 알이 섞였으리라 본다며 확실하게 복어 독이 들어갔는지 정밀히 조사하게끔 하고 해산물 잡는 건 금지하지 말라고 건의하여 받아들였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4028_002|#]] 세종 6년(1424년)에는 복어 독을 이용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위가 장인이 먹는 국에 복어 독을 탔다고 한다. 사위는 잡혀서 곤장과 고문을 맞고 자초지종을 실토한 뒤 옥사했고, 이를 돕거나 알고도 모른 척한 딸과 후처는 [[능지처참]]으로 사형당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12006_002|#]] 그럼에도 복어 독이 악명높았음에도 복어의 맛을 쉽게 포기할 순 없었는지, 도전한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허균]]은 자신의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좋은 [[술안주]]로 게 요리와 함께 봄철 복어를 꼽았다.[* [[허균]]은 영동 지방의 복어보다 [[한강]]에서 나는 복어(황복)가 맛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조선 후기 문신 서영보는 "복사꽃이 무수한 계절에 미나리, 참깨맛이 그리워라. 이제 복어 계절을 또 보낸다."며 아쉬워했다. 무엇보다 봄철만 되면 복어를 회나 탕으로 먹는 등 식용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고, [[규합총서]]에도 복어 요리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내내 복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발달한 복어 요리 기법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거주지였던 [[부산광역시|부산]] [[원도심(부산)|원도심]]이나 [[대구광역시|대구]] [[북성로(대구)|북성로]], [[창원시|창원]] [[마산합포구|마산]]에는 일본식 복어 요리전문점이 여럿 들어섰는데, 이때 일본의 복어 요리 기법이 한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본다. 지금도 복어를 다루는 대부분의 요리사들이 일본식 요리칼을 이용하고 있으며, 복어를 얇게 써는 방법, 복어와 곁들이는 식재료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영향이 있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복집인 금수복국도 1970년에 재일 동포가 창업한 것이다. 상기했듯이 부산과 창원이 복어 요리로 유명한데, 이는 제주에서 많이 잡히던 [[참복]][* 1990년대 초반 까지도 전국의 참복은 전량 제주에서 잡혔다.]이 부산과 창원으로 보내진 다음 전국으로 배송되던 유통 구조 덕이다. 직선거리로 더 가까운 목포나 여수는 1980년대 까지도 화물부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서 제주로 오가는 화물량의 대다수를 [[부산항]]을 통해야 소화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제주의 참복은 한국 최대의 어시장이 있는 부산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과 창원 마산에는 복어 전문점 거리가 많다. [[대구광역시|대구]]도 내륙지역인데도 불구하고 복어 요리법이 발달해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가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로 발달했었고, 해방 이후에도 섬유 산업 등으로 부유층이 많아 고급 미식의 불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이미 복국이 대구 부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는데, 그 값은 현재로 말하면 한 끼 100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먹는 것과 진배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년대 골목형 복국집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복어가 서민들도 먹어는 볼 수 있는 요리로 정착했다. 복어 불고기 같은 독창적인 메뉴도 대구와 경산에서 개발된 것이다. [[대한민국/경제|경제]]가 [[한강의 기적|발전]]하면서 국민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해방 이후 떨어졌던 복어 소비량이 다시 증가했다. 최근에는 복어회 외에도 복어 불고기, 복어 껍질 무침회, 복어 수육, 복어찜, 복어탕, 복어튀김 등 복어 요리가 인기를 끌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