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혜숙 (문단 편집) == 생애 == 1904년 6월 7일 [[충청남도]] [[보령시|보령군]] 우라면 평신리(현 [[보령시]] [[동대동]] 평신마을) 성주산 밑에서 [[개신교]] [[전도사]]인 아버지 복기업(卜箕業)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저연[* [[효령대군]]의 13대손.]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복기업은 득녀 전부터 관헌의 눈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함경도]]에서 충청남도 보령군으로 내려와 숨어 살며 개신교 [[선교]]활동에 종사해 왔으나 [[동학농민운동]] 진압 당시 동학으로 몰려 관헌에 붙잡혀 부부와 같이 감옥에 갇혀 고초를 치렀다. 당시 그의 부인 이저연은 만삭의 몸으로서 한학자인 부친이 손을 써서 자신만 풀려나 [[임신]] 9달 만에 복혜숙을 낳은 것이다. 태어날 때만 해도 몸이 약했으나 점차 자라서 남자 옷을 즐겨 입으며 연날리기, 줄 끊어먹기 싸움 등을 즐기며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부친은 가산을 정리하고 [[하와이]]로 [[이민]]을 가려고 [[인천]]으로 옮겼지만, 3세 때에 3살 위의 언니와 6살 위의 오빠를 각각 잃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민 자체를 이루지 못하자 [[논산]]으로 내려가 전도사업을 했고, 아버지에게는 신식 교육을, 어머니에게는 한학을 각각 배웠다. [[영화초등학교(인천)|영화소학교]] 재학 시절인 1912년에 교회 성극에서 동정녀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아 연기를 처음 익혔고, 1915년 49세 되던 모친을 여의고 [[경성부]]로 상경해 [[이화학당]] 보통과를 다녔다가 1919년에는 수예교사가 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기예학교를 다니며 [[영화]]와 [[연극]]을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고, [[도쿄]]의 사와 모리노 무용소에서 [[무용]]과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국에 돌아와 [[강원도(북한)|강원도]] [[김화군]]의 금성학교에서 9달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럼에도 또다시 집을 나와 경성으로 가서 1920년에 신극좌의 작품 <오호천명(변기종 연출)>을 통해 처음 무대에 섰다. 1922년에는 조선배우학교를 졸업하고 토월회를 거쳐 1925년 조선극우회, 1936년 중앙무대 등지의 극단을 거쳐 이월화에 이은 차세대 연극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가히 [[미녀]]라 벚꽃이 녹아든 여성같았다"고 한다. 1923년에 윤백남 감독이 만든 [[조선총독부]]의 계몽영화 <방역>에 처음 나왔지만, 1926년 이규설 감독의 극영화 <농중조>를 통해 본격적으로 은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1927년 <낙화유수>, 1928년 <사랑은 신과 같다> 등지에 나와 경력을 쌓다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인 의사 [[김성진]]과 결혼하면서 잠시 연예활동을 중단했지만, 1935년 박기채 감독의 <춘풍>을 통해 은막으로 복귀했다. 1940년 <수업료>를 시초로 할머니 역을 맡기 시작해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도 <[[똘똘이의 모험]]> 등지에서 꾸준히 어머니나 할머니 역을 주로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때는 국방부 정훈국 산하 문총구국대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입대한 바 있다. 영화 외적으로 1926년 경성방송국 시험방송 당시 내보낸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새벽종>을 시초로 성우로도 활동했고, 1962년 KBS-TV 드라마 <아내의 얼굴>을 시초로 브라운관에서도 발을 내밀었다. 그 외에 1928년부터 [[인사동(종로구)|인사동]]에 다방 '비너스'를 차려 8년간 경영했고, 1961년 한국영화인협회 출범 당시 초대 연기분과위원장을 2년 간 맡았으며 이후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1966년 서울소녀가극단 대표, 1973년 극회아카데미 대표 등을 각각 맡았고, 장관 부인 신분으로 1967년경부터 [[대한제국]]의 [[황족]] [[이방자]] [[공주]]에게 칠보제작을 배워 취미로 삼기도 했으며, 1970년 칠보동우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다. 1980년경 자택 정원의 [[라일락]]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다리를 삔 것 외에는 별 탈 없이 정정하게 살다가 1982년 10월 4일 오후 3시, [[교동]] 자택을 걷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으로 이송됐으나 5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동 병원 영안실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져 벽제 서울시립장재장에서 화장되어 관음사에 봉안됐고, 동월 23일에는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다만 사후 일제 말기 당시 친일 선전영화에 나왔다는 이유로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