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본(독일) (문단 편집) == 역사 == 1597년부터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였다.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쾰른 선제후직을 약 200여 년 동안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했는데, 이들은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한 [[쾰른]]을 버리고 가까운 본에서 머물렀다. [[베토벤]]의 어린 시절 쾰른 선제후[* 여담으로 이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 아들이다. [[선제후]]가 된 이후로는 맏형 [[요제프 2세]]와 손윗누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는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가 나오는 이유도 쾰른 선제후가 쾰른이 아닌 본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1949년]] [[서독]](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이후 법적인 수도는 [[베를린]](서베를린)이었지만, [[동독]]에 둘러싸여 있는 [[월경지]]였던 탓에 수도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지리학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다른 곳에 [[천도|수도 기능을 이전]]해야 했다. 유력한 후보군으로 독일 최대의 항구이자 제2의 도시 [[함부르크]], 바이에른의 주도이자 제3의 도시 [[뮌헨]], 주요 공업지대인 [[라인란트]]의 중심지이자 제4의 도시 [[쾰른]] 등이 거론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후보는 바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전쟁 이전부터 이미 경제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서독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주도가 아니라는 점도 작용했다.[*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헤센]] 주의 주도는 근처의 [[비스바덴]]이다.] 또한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미군]] 관할지역의 수도 역할을 한 적이 있어서 행정 중심지로서의 자격 또한 충분했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에 독일 의회로 사용할 건물도 지었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도 내심 기대하였으나 서독의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가 본을 수도로 지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여기엔 본이 아데나워 총리의 출생지이자 고향인 [[쾰른]] 시와 가깝다는 명분도 있었다.], 다른 정치인들 또한 프랑크푸르트를 수도로 정할 경우 "프랑크푸르트가 서독의 공식 수도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베를린으로 도시 수도를 환원하는 게 힘들어지므로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본이 서독 수도로 결정되었다. 뒤집어 말하면 프랑크푸르트는 사실 굳이 수도가 아니라도 중세부터 유서깊은 역사와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그리고 독일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지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중요하고 상징성이 큰 도시였기 때문에 서독 정치인들도 여기 수도 박았으면 분단이 영구화되는 인상을 주는것 같아 '분단은 독일사에서 일시적인 현상일뿐이다'란 메세지를 주기 위해 촌구석인 본을 선택했단 얘기가 된다. 군사 안보상으로도 프랑크푸르트가 당시 동독령이었던 튀링겐 지역과 너무 가까운 최전방이라 안보 관련 우려가 있었던 것[* 근처의 풀다 갭(Fulda Gap) 때문.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바르샤바 조약기구 병력이 대규모로 가동하려면 북독일 평원 아니면 여기 외엔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 여기가 뚫리면 바로 그 다음은 프랑크푸르트고, 프랑스 국경까지 일직선으로 기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NATO로선 목숨 걸고 방어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나폴레옹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퇴각 루트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지역.] 또한 한몫 했다.[* 사실 동독-프랑크푸르트 거리가 북한-서울 거리보다는 훨씬 멀다. 하지만 상대가 북한이고 임진강 방어선이 있는 서울과 달리 서독은 소련을 위시한 WTO군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데다가 이쪽은 내독국경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쭉 야트막한 구릉지의 연속으로 이렇다 할 방어선을 설정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본을 수도를 두면서 서독 정부는 프랑크푸르트를 사용할 때보다 추가로 9,500만 마르크를 지출해야 했다. [[동서독 통일|독일 재통일]]로 [[베를린]]이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자 1994년에 각 정부 기관들을 [[베를린]]으로 다시 옮기기로 결정되었지만, 구 서독 지역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 독일 연방의원들 중에서도 의회 이전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의회에서 투표를 실시했는데, 베를린 338표 vs 본 320표로 근소한 차이로 베를린으로의 이전이 결정되었다.] 특히 본이 반발이 거셌지만 이에 대해 수도 노릇을 못해 본 [[프랑크푸르트]]가 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내가 못 하면 너도 못 한다-- 다만 몇몇 정부부처는 계속 본에 남았다. 2021년 기준으로 14개의 연방 정부부처 중 6개 부처가 본에 본부를 두고 있다. 심지어 본 시내에는 아직도 대통령궁과 총리공관이 유지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각각 해머슈미트 별장(Hammerschmidt Villa)과 샤움부르크 궁전(Palais Schaumburg). 베를린의 벨뷔 궁전과 [[연방총리청]]으로 이전한 뒤에도 모두 제2의 공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사실 동베를린에는 동독정부청사가 있었기에 [[공화국 궁전]][* 2006년 철거되었고, [[호엔촐레른 왕조|호엔촐레른 가문]]의 로비와 서독 시민들의 성금이 모여 2020년, 공화국 궁전 터에 베를린 성이 재건되었다. 현재는 훔볼트 포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을 통일정부청사로 그대로 쓸수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 자리가 옛 프로이센의 [[법궁|정궁]]이었던 베를린 성 터라서 상징성 문제 때문에 정부청사로 쓰기 곤란했고, 건물의 [[석면]]을 제거해야 해서 어차피 돈을 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그래서 거하게 돈을 들여 정부청사 신축작업에 들어갔고,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연방정부 업무를 나눠서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