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본관 (문단 편집) == 역사 == 본관의 원조인 중국에서는 성(姓)과 씨(氏)가 다른 개념이었기에 본관이 두드러졌다. [[성씨|성]]은 혈연을 의미하고 씨는 지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구분하던 풍습은 [[춘추전국시대]]에 격동을 겪게 되는데 성은 여자가, 씨는 남자가 물려받는 것으로 변했다가 둘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세가|세가]] 등의 ○○를 일종의 본관으로 취급할 수도 있으나 현재 중국에서는 한국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중국에서는 가문을 소개할 때 "저는 ○○의 n대손입니다."식으로 자신의 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종친회의 힘이 강한 집안의 경우는 씨에 해당하는 본관의 분파까지 해서 ○○파 몇대손 누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름에 다는 일정한 [[항렬]]자라는게 존재한다. [[한국]]의 본관은 940년 [[고려]] [[태조(고려)|태조]] 대 [[당나라]]의 관습을 모방하여 귀족이나 [[고려/호족|호족]] 같은 유력자들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전국 군현에 본관 및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 이전에는 [[남북국시대]]의 경우 왕족 및 귀족층의 주요 성씨를 예로 들자면 [[발해]]의 경우 왕성인 [[대(성씨)|대(大)]] 및 주요 귀족 성씨인 [[고(성씨)|고(高)]], [[장(성씨)|장(張)]], [[양(성씨)|양(楊)]], [[두(성씨)|두(竇)]][* 하(賀)씨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오(성씨)|오(烏)]], [[이(성씨)|이(李)]], [[배(성씨)|배(裵)]], [[왕(성씨)|왕(王)]]씨가 있었고[* 발해인 인명 중 김, 박, 배씨는 신라계 귀화인일 가능성이 높다. 김씨나 박씨는 신라계라는 유래가 명확한 편이지만 배씨는 당나라에도 이미 많았기 때문에 중국계였을 가능성 또한 높다. 어느 쪽이든 배씨는 귀화계였을 가능성이 높은 게 발해사에서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특정 시점부터 갑자기 늘어난다. 김씨도 중국에서 많진 않아도 [[김일제]] 등 이미 사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신라계일 경우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중국계였을 가능성 또한 아예 배제할 순 없다.] [[신라]]의 경우 [[왕족]] 3성씨인 [[박(성씨)|박(朴)]], [[석(성씨)|석(昔)]], [[김(성씨)|김(金)]] 및 주요 귀족이었던 6부에 하사된 성씨 [[이(성씨)|이(李)]], [[최(성씨)|최(崔)]], [[정(성씨)|정(鄭)]], [[손(성씨)|손(孫)]], [[배(성씨)|배(裵)]], [[설(성씨)|설(薛)]] 및 [[가야]] [[금관국]] 계통 김씨가 확인되고 했으나 이 중 본관까지 사용된 경우는 확인된 바 없다.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백제]] [[위덕왕]]의 태자 시절 [[고구려]] 장수와의 일기토 사례를 보면 양쪽의 장수가 나와서 각자의 가문과 선조 등에 대한 얘기를 얘기하고 [[나노리|이름을 나누는 것]]으로 되어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삼국시대 왕•귀족들의 경우 굳이 당나라에서 확립된 본관성씨제가 아니라도 가문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290_0030|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에 의하면 신라에 편입된 가야계 김씨([[김해 김씨]])는 신라 사회에서 자신들을 신라계 김씨([[경주 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신김씨(新金氏)라는 이름을 써서 구분하는 관념을 찾을 수 있다.[* 비슷한 구분으로 조선시대에 가야계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 신라계 김해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구분했던 사례가 있다. 후김은 이후 김해의 다른 이름인 [[김녕 김씨]]를 쓰고 있다.]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80_0020_0030|황룡사 찰주본기]]에 있는 인명 명단을 봐도 김현웅과 김평긍 두 사람은 신김씨라고 따로 표시하고 있어, 한자가 같은 두 김씨의 가문을 명확히 구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후삼국시대]]의 인물들이 성+이름, 이름으로 표기가 혼용되는 경우가 많아 고위귀족이나 호족, 원래 성씨에 대한 전통이 있던 중국계가 아닌 경우는 성씨가 보편적으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나 앞서 설명한대로 가문에 대한 개념으로 조상의 이름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고구려를 정탐한 중국인의 기록에 성씨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고, 의외로 귀족들의 경우에도 사서상으로는 성씨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의 후손이라는 식의 이름 대기가 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신라, 가야의 초기 금석문을 보면 지명, 부족명, 관직명 등을 이름 앞에 같이 붙이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사자에 대한 설명을 보조하고 있으며, 당장 현대에도 [[중동]]의 [[아랍어]]권에서는 이름에 조상의 이름을 나열하는 식으로 붙여 가문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집어넣는다.] 서양에서도 성씨에 붙는 슨/손(Son) 맥(Mac), 오(O) 등의 흔적이 남아있어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고려시대 초기 이후부터는 본관성씨제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후 고려 [[문종(고려)|문종]] 대에 [[과거 제도]]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관과 성씨를 기입하게끔 하면서 양인 계층(귀족+평민)에 대한 본관성씨제의 보급은 더욱 확대되었다. 현대의 본관 개념은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가닥이 잡혔기 때문에,[* 본관의 기원을 [[남북국시대]]로 소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는 성씨 자체가 거의 중앙귀족 혹은 일부 호족만의 극히 한정된 관습이었기 때문에 따로 본관을 사용하진 않았다. 본관 자체가 후삼국시대 각지의 호족들의 등급 매기기용이기도 했기 때문에(XX 출신이다 하면 대호족인지 중소호족인지가 대략 드러났다) 고려가 성립되고 난 뒤에야 출현한다.] 현재 대부분의 본관도 고려 초의 영토였던 [[평안남도]]-[[원산]] 이남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평안북도~함경도의 북한 지역에 본관을 둔 경우가 흔치 않다. 물론 그 지역들에 본관을 두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으나 이러한 경우 대부분 오래 전 성립된 전통적인 가문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면 된다. 또한 그나마도 조선 중후기부터 군역과 조세를 피하기 위해 상민들이 양반계층의 족보를 매매하면서 본관의 통폐합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각종 전란 등의 이유로 양반이 잘 없어서 차별당하던 저 지역들의 본관을 쓸 이유가 없으므로 기피되었던 것도 있다. 고려 대 본관의 기능은 후대와는 달리 단순한 혈통 구분만으로 한정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호족 등의 지역공동체가 연합하여 성립된 고려의 특성상 본관은 어떤 가문의 세력이나 지위, 출신 배경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주지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본관만으로도 가문의 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진 13세기부터는 정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전란 중엔 각자가 알아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이동이 확산된다. [[조선]] 대 본관의 기능은 자신의 혈통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자신과 동일한 혈족 집단끼리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금기시 내지 금지되면서, 동족끼리의 혈통이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능했다. 이 개념 때문에 역사적 인물들의 고향에 대한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시대까지는 사람을 무조건 본관 지역의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실제 출생지나 활동 거점과 괴리가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같은 본관이라도 세거지별로 구분되어 아예 본관처럼 사용되곤 했던 것도 이러한 괴리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결같이 본관과 성씨를 가지고 있지만 조선 초중기에는 백정과 천민을 중심으로 무성층이 상당수 비율로 있었다.[* 다만 천민이라도 성씨를 가지는 경우는 있었기는 했다. 그야말로 케이 바이스 케이스였다는 것.] 하지만 부유한 하층 계급이 [[족보]]를 사들이면서 신분제에 대한 동요가 시작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 [[1950년]] [[6.25 전쟁]]으로 관습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신분 계급이 완전하게 파괴된 데다가 1908(융희 2)년 민적법 시행으로 누구나 필수적으로 본관을 갖도록 법제화하면서, 모든 국민이 본관과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계 외국인]]의 경우에도 한국계인 이상 무조건 본관을 성씨를 함께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전주 이씨|조선 왕조의 후손]]이다"라든가 "나는 [[경주 김씨|신라 왕조의 후손]]이다"와 같은 주장은 [[종가]], 가족이나 친척이 [[종친회]]에 연관됐거나 [[집성촌]]에 살지 않는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 특히 수 차례의 역사상 격변기{{{-1 (각각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 조선 후기 혼란기, [[개화기]],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를 겪으면서 [[제사]]를 주재하는 장자(長子), 장손(長孫)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누가 누구의 진짜 혈통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성과 씨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할 때 대개 본관을 씨에 대응하는 경우가 많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성은 같지만 동계(同系)가 아닌 경우(예컨대 횡성 고씨와 제주 고씨의 관계[* 전자는 고구려의 국성이고 후자는 제주의 토성(土姓)이라 서로 관련이 없다.])가 있는가 하면, 성이 다르나 동계인 경우(경주 김씨와 경주 최씨의 관계[* [[알천]]의 성이 (진골이니) 김씨라고도 하고 ([[소벌공]]의 후손이니) 최씨 혹은 소씨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두 성씨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도 있으므로, 한국의 성과 본관은 중국의 성과 씨의 역할을 모두 조금씩은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