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본관 (문단 편집) === 일본 === 일본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 제정과 함께 호적제도가 도입되면서 본관 개념이 함께 도입되었다.[* 이 때의 名字는 중국에서 [[자(이름)|字]](아자나)를 들여와서 名字(나아자나)로 불렸고, 기존의 [[겐페이토키츠]]와 같은 [[우지(성씨)|우지]](본성)에서 집안 혈통과 가계가 중요해지면서 서로의 집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것 뿐이었다. [[고노에]], [[구조(성씨)|구조]] 등 [[고셋케]] 가문이 이러한 경우였다. 실질적으로 본관지가 名字를 이루는 것은 이러한 [[헤이안 시대]]의 나아자나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 [[공가]]들에서 영향을 받은 [[무가]]들이 名字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 이 때에는 각각 지정된 본관지(本貫地)가 있었고, 이 본관지의 호적에 실려 함부로 본관지를 떠날 수 없었다. 도망치다 걸린 경우 도망지에 편입되는 당소편부(当所編附), 본관지로 강제 송환되는 본관환부(本貫還附)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겐페이토키츠]]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지(성씨)|우지]]·가바네 등 본성(本姓)이 [[헤이안 시대]] 동안 소수의 성씨가 너무 흔하게 퍼져 서로를 구분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는 이 본관지에서 따온 묘지(苗字, 名字)가 본성 대신에 서로를 구분하는 실질적인 성씨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막부의 무사들은 [[잇쇼켄메이]], 즉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영지(역사)|영지]]를 분봉받았고, 이 영지의 이름(名)에서 딴 가명(仮名)으로써 묘지라는 새로운 성씨를 개창하고 서로를 구분하였다. 이 영지를 일컬어 본관(本貫), 본관지(本貫地, 本貫の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과정에서 시조의 출생지라는 개념과 조상신·[[토지신]] 신앙이 합쳐지면서, 본관을 지칭하는 단어가 토지신을 뜻하는 우부스나(本貫·産土)로 읽히게 되었다. 이러한 분봉받은 본관, 본관지 개념에서 나온 名字는 점차 분할 상속에 따라 그 수가 많아졌으며[* 이로 인하여 묘지(名字)의 수는 많아져갔으나, 주의할 점은 이들의 본성(우지,氏)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남동생은 묘지가 다른 와키야 요시스케(脇屋義助)이지만, 본성인 우지로 표현할 시 모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 요시스케(源義貞, 源義助)가 된다.], [[에도 시대]] 말기가 되면 사실상 우지와 가바네를 완전히 대체하여 이들은 공문서에서나 쓰이고 실질적으로 묘지가 쓰이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서 성씨를 묘지로 일원화함과 함께 우지·가바네 등을 모두 폐지하여 현대에까지 이른다. 일본의 경우에는 고대 [[우지(성씨)|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유력 인물들의 후손(특히 무가의 경우가 많다)들이 시조의 영지나 거주지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경우가 많은데, 한국·중국과 다른 점은 본관과 성씨를 함께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관 자체가 씨(氏)로 쓰였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였던 마쓰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의 경우, 마쓰바라(松原)는 본관지인 하리마노쿠니 마쓰바라장(播磨国松原荘 : 현재의 효고현 히메지-아리마 일대)을 뜻하는 것이며, 실제 [[우지(성씨)|성]]은 미나모토(源)였다. 이렇듯 일본의 본관은 사용 형태가 달랐는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기재할 때는 '''본관(씨)-관직-성(+카바네)-이름'''의 순서로 쓰곤 했다. 그리고 성을 쓸 때는 '''성-본관'''의 순으로 한국·중국과는 반대로 썼다. 앞에서 예를 든 마츠바라씨의 경우에는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쓰시류 마쓰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로 표기한다. 다만 본관 대신 새로운 성을 만들어 쓰는 인물도 있었는데, 1566년 조정의 허가를 받고 [[도쿠가와]]씨(徳川氏)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1566년 개성 이전까지 이에야스의 성은 [[마쓰다이라]](松平)로, 본관은 미카와노쿠니 마쓰다이라촌(三河国松平村)이었다. 마쓰다이라씨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전쟁에서 패해 몰락한 세라다 가문의 후예, 무사 지카우지는 아버지와 함께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환속해서 미카와 지역의 마쓰다이라라는 마을에 정착하였고, 그 곳의 영주의 딸과 결혼했다. 이것이 바로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무장 가문들처럼 내놓을 만한 족보 수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미카와의 지배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되자, 조정에 상소를 올려 황족 출신 무가인 [[미나모토|세이와겐지]](清和源氏) 닛타시류(新田氏流)의 후손을 자처하며 성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이를 수락했고, 이에야스는 곧바로 본관이자 성이었던 마쓰다이라를 버리고 도쿠가와씨로 개성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씨는 씨와 본관이 다른 몇 안 되는 무가 중 한 가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버린 마쓰다이라 종가의 종손 자리는 그의 아들이 넘겨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